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배꼽문화의 혁명, 혹은 구멍
배꼽에서 어머니의 자궁을 생각하며
배내웃음, 배내옷, 배냇냄세, 배냇니, 배내털, 배냇머리, 배냇짓... . 배에 얽힌 토박이말들이다. 누구든 국어사전을 펼치면 배로 시작되는 무수한 토박이말을 찾을 수 있다. 배에 얽힌 풍부한 어휘로 미루어 보아 우리 민족에게는 '배꼽문화'가 일찍부터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태어난 아기는 세상에서 처음 입는 옷인 배냇저고리를 입는다. '배내'는 바로 '배'를 말한다. 입을 벌려 소리없이 가볍게 웃는 모습을 '배식배식 웃는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놀던 '배냇짓', 아기를 임신하였다는 뜻인 '배슬리다', 혹은 '배임'이란 말, 이 모든 게 배꼽과 연결된다. 옛 사람들은 태교를 중시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예외없이 태몽을 꾸었으며, 때로는 배꼽을 보고서 태아를 점치기도 했다. 대충 다음 같은 속신이 전해진다.
임부의 배꼽이 튀어나오면 딸, 들어가면 아들. 임부의 배꼽이 단단하면 딸, 물렁물렁하면 아들. 아기의 태동이 심하면 아들, 얌전하면 딸.
아기가 자라나서 어른이 되어서도 증거물은 남는다. 탯줄의 매듭을 자른 유일한 증거물인 배꼽만큼은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일생 동안 남게 된다. 뱃속의 아이는 탯줄로 생명을 유지한다. 탯줄은 자궁으로 이어진다. 어둡고 비밀스런 자궁은 태초의 숨결을 머금고 신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자궁의 숨결을 '태동'이라 불렀으며, 그래서 새로운 움직임을 '태동'이라 표현한다. 어머니는 아기가 발길질하는 태동을 통하여 새 생명의 출산을 예감했으며, 인류 역사도 늘 새로운 태동을 통하여 변화, 발전하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어머니의 자궁과 연결되었으며, 그들 자궁은 탯줄과 연결되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인류의 역사를 탯줄의 이어짐으로 풀이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배꼽은 바로 이 탯줄의 출구이다. 태어를 세상과 이어주는 구멍이다. 또한 배꼽은 생명의 근원지 그 자체이다. 어두컴컴한 자궁에서 탯줄을 따라 생명은 숨을 이어왔다.
우리의 탯줄은 어디에 있을까
지리산 노고단 남부능선이 이어진 수려한 계곡, 마을 앞으로 섬진강 줄기가 흘러가는 구례 운조루에 가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배꼽문화'가 있다. 운조루의 주인인 문화 유씨 집안에서는 장손의 태를 태워서 남은 재를 단지나 옹기 같은 태반에 담는다. 태반은 사당의 숲 그늘에 소중하게 묻어둔다. 장손이 죽으면 태반에 넣어두었던 재를 꺼내어 관 속에 함께 넣어준다. 새 생명을 지켜준 탯줄은 그 집안에서 평생을 함께 살다가 주인공의 죽음과 더블어 마지막 동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민간에서는 태를 태우거나 물에 떠내려보냈다. 깨끗이 태워버리거나 모르는 곳으로 멀리 떠나가야 좋다고 믿었다. 어릴 적 한강가에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늘 강가에 나가서 노는 일이 우리 '악동'들의 일과였다. 검정 고무신으로 송사리를 잡는다거나 조그만 조개를 줍는 일, 하얀 물새떼를 쫓아다니거나 강변에서 뗏목을 구경하는 일 따위는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다. 그런데 물에 띄운 탯줄이 모래톱에 걸리는 일이 종종 있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징그러웠는지. 탯줄을 강물에 띄워버리는 풍습은 서울의 보편적인 관행이었고, 나의 탯줄도 아버지의 손으로 한강에 띄워졌다고 한다. 여러분의 탯줄은 어디로 갔는가? 태웠는가, 묻었는가, 아니면 어느 강가에 띄워졌는가.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반드시 여쭈어보길 바란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탯줄의 행방조차 알 수 없다고 하는 이들도 태반이리라.
서민들의 탯줄 처리는 그렇다 치고, 구중궁궐에서는 어떻게 했을까. 태실로 대표되는 왕실의 '배꼽문화'는 가히 통치권자만이 누리는 특권적인 것이었다. 왕족이 태어나면 태를 태우지 않고 태항아리에 담아 태실에 모셨다. 태실에 모신 태의 주인 중에서 왕이 되는 자가 나타나면 특별대우를 하여 태봉이라 부르는 또 하나의 '왕릉'을 차렸다. 태는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보았기에 국운의 흥망성쇠와도 연관지었다. 왕릉은 왕궁에서 100리 안쪽에 써야 했으나 태실만큼은 거리 제한을 두지 않았다. 아무리 멀더라도 풍수의 명당을 찾아 태의 거처를 정했으니,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성주군 월향면 인촌리에는 무려 13위의 조선왕조 태실이 전해질 정도다. 인촌리의 서진산이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산은 태봉으로도 봉해졌다. 태실의 사방 300보(약 500m) 거리에는 금표를 세워 강력히 보호했다. 모든 일은 관상감에서 관장하였고, 태의 호송과 태실의 역사는 선공감에서 도맡았다. 태를 봉송하는 책임자로 안태사 같은 벼슬을 내려 관리를 특별 파견했을 정도였다. 또 한 석물을 설비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는 등, 왕의 위엄에 걸맞게 태봉을 모셨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중요시했던 태를 일제가 그냥 둘 리 없었다. 일제는 수많은 태실을 마구잡이로 모아들여 서삼릉에 집결시켰다. 조선왕조 500년간 모든 왕족의 배꼽이 들어 있는 태실을 연병장에 병사들 집합시키듯이 모아들였다. 태실을 명당에서 들어내 민족정기를 진압하려는 가증스런 작전은 빈틈없이 이루어졌다. 서오릉 바로 옆의 서삼릉에 집결된 태실들은 일본식 담장과 문으로 봉쇄하였다. 태실을 표시하는 비석들은 일본을 뜻하는 일(한자 날일)자로 배치되었다. 명산의 정기마다 쇠말뚝을 박았던 식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우리들 배꼽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세상의 중심인 배꼽
배꼽은 늘 세상의 중심을 뜻한다. 배는 삶의 중심이기도 하다. 인간사에서 배고픔보다 절박한 것이 있을까. 배고픔이란 세 글자는 인생살이에서 고통의 상징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일뿐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삶 자체를 배고픔으로 표현했으니 말이다. 배꼽은 의학적으로도 중심이다. 한의학에서 제라고 부르는 배꼽은 신체의 정중앙과 무게중심에 해당된다. 단전을 세 군데 꼽는바, 상단전은 눈썹 위, 중단전은 명치, 하단전은 흔히 말하는 단저능로서 배꼽 밑 2촌 4푼 거리를 가리킨다. 지금 바로 손을 배꼽에 놓고서 2촌 4푼 거리를 내려가보면 틀림없이 하단전에 당도할 것이다. 따라서 배꼽은 호흡에서도 기준이 되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단전호흡에서 중요한 호흡법인 태식법은 태아가 숨쉬는 방법을 재현한 것이다 탯줄에 매달린 아이의 호흡이 가장 원초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민간상시긍로도 단전 아래가 차가우면 안 좋은 것으로 본다. 목매달아 자살한 사람도 포도청의 나졸들이 나아서 검사할 때, 배에 온기가 있으면 되살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을 정도로 배는 생명의 원천이었다. 무더운 여름, 잠자리에서 배만큼은 덮고 자야 한다고 이부자리를 챙겨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에서 도 그 중요성은 확인된다. '배앓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포괄성을 상상해보라.
배꼽은 정기의 근원이기도 했다. 정력제라고 하여 태를 먹는 정력에 미친 아저씨들도 많다는 사실에서, 과연 배꼽이 정기의 근원임을 새삼스럽게 배운다. 사실 배꼽을 먹는 풍습은 매우 오래 된 풍습이었다. 아기의 탯줄을 잘못 잘라서 덧난 태독에는 배꼽 떨어진 것을 말렸다가 다려서 먹었다. 혹은 태를 태운 재를 가루 내어서 발라주기도 했다. 어쨌거나 병원에서 태를 은밀히 처리하여 정력제로 팔아먹기도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보면 여간 언짢은 일이 아니다. 우리 아기들의 탯줄이 산부인과에서 팔려나가고 있는 이 어지러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배꼽은 웃음과 시기, 질투의 중심이기도 했다. 심하게 웃길 때, 누구나 '배꼽을 뺐다', '배꼽을 쥐었다'고 한다. 웃기는데 왜 하필 배꼽이 연상될까. '골때린다'는 비속어가 등장하기전까지, 적어도 웃음만큼은 배꼽의 전유물이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서처럼, 시기 질투에서도 중심이었다.
배꼽은 심지어 동네에서도 중심이었다. 동네 한가운데의 중심되는 큰 마당을 옛 사람들은 배꼽마당이라고 불렀다. 이동하의 소설 <우울한 귀향>을 보니 배꼽마당을 이렇게 썩 잘 표현해놓았다.
"올망졸망 늘어서 있던 아이들의 그 조그만 머리 속에 오만가지 기묘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던 그 배꼽마당의 진상은 곧 뜨거운 뙤약볕 아래 환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배꼽은 인간, 아니면 여타 포유동물들만의 전유물일까. 물론 '아니다'. 포유동물의 전유물 같지만 '식물의 사생활'을 잘 들여다보면 식물에도 배꼽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꽃받침이 떨어진 자리가 유난히 뽈쑥 튀어나온 배곱참외를 연상해보라. 식물에게도 배꼽은 생명의 근원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중심인 배꼽은 우리 민족에게마 ㄴ적용되는가. 멀리 북쪽 시베리아 야쿠트로 떠나가 보자. 시베리아인들은 '세상의 황금배꼽'에 가지가 여덟 개인 나무가 자란다고 믿는다. 이 나무가 자라고 있는 '세상의 황금배꼽'은 원초적인 낙원이다. 이 낙원은 최초의 남성이 태어나, 나무 둥치에서 윗몸만 내민 여성의 젖을 먹고 자라는 그런 땅이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 태평양 신비의 섬 이스터로 떠나가 보자. 폴리네시아의 토속 이름은 원래 테 피토 테 헤누아인데, 이것은 섬들 중의 배꼽이란 뜻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의 말을 빌리면 이스터 섬에 붙여진 가장 오래 된 이름이라고 한다. 문명 이동의 흔적을 찾아서 콘티키란 뗏목으로 남태평양을 건넜던 토르 헤이에르달은 <콘티키>란 책에서 이렇게 기록을 남겨주었다. 이 섬의 동쪽 최초의 장이족이 상륙했다는 곳 근처에는 '황금의 배꼽'이라 부르는 잘 다듬은 둥그런 돌이 놓여 있고, 또 이곳은 이스터 섬의 배꼽으로 알려져 있다. 시를 알았던 폴리네시아인의 조상들이 섬의 동쪽 해안에 섬의 배꼽을 조각해놓고 페루에서 가장 가까운 섬을 이보다 서쪽에 있는 여러 섬의 배꼽으로 택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폴리네시아의 전설은 '섬의 발견'을 '섬의 탄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전설을 생각할 때 이스터 섬이 여러 섬들의 탄생 표시인 배꼽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의 애초의 고향을 이어준 점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 마땅할 것이다.
배꼽에서 혁명을 생각하며
1892년 임진년 여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꼭 300년 되던 해. 세상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란 소문이 돌아 민심이 흉흉스러웠다. 그때 선운사 석불의 배꼽비결사건이 기름에 불 붙이듯 민중혁명의 불을 붙였다. 영광접주로서 실제 현장에 있었던 오지영의 <동학사>는 당시 정황을 소상히 알려준다. 그해 8월의 일이다. 석불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 그 비결이 나오는 날은 한양이 망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무장현의 손화중 접중에서 농민군이 백주 대낮에 횃불을 들고 선운사를 들이쳤다.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무언가를 꺼냈다. 세상이 뒤바뀔 만한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호남 일대에 퍼져나갔다. 소문이 확산되자 고창, 고부, 무장, 부안, 영광, 장성, 흥덕, 정읍 등 전북 우도 일대에서 수만명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비기가 드디어 민중의 손으로 들어갔음은 곧바로 한양의 기운이 그 명을 다한 것으로 판단된 까닭이다.
왜 하필이면 선운사 마애불의 배곱이었을까. 선운사 석불을 보면 정작 어디에도 배꼽은 없다. 실제로 동학도들이 비결을 꺼냈는지, 어떤 비결이 있었는지 확인된 바도 없다, 아니, 동학도들은 비결을 꺼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훗날 그 비결은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나 <목민심서>였을 것이란 설도 전해졌다. 세상 갈아치우는 혁세의 한마당에서 판을 새로 짜기 위한 통과제의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비결 탈취사건은 세상 판갈이로 나아가는 '좁은 문', 혹은 '구멍'같은 것이었다. 동학 지도부가 연출했음직한 이 사건의 불가사의는 배꼽의 비결에 있다. 새 생명은 배꼽으로 연결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에게 변혁으로 나아가는 출구로 배꼽이 선택된 것은 바로 이러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중세사회를 마감하면서, 민중들의 혁세사상을 펼치고자 했던 동학농민전쟁의 불꽃이 바로 생명의 상징인 배꼽에서 당겨진 것이다.
'배꼽혁명'의 시대에서 '배꼽 섹스 어필'의 시대로
이로부터 97년 뒤인 1989년 여름, 나는 동경에 있었다. 자료수집차 일본에 갔다가 동경 교외에 사는 일본인 친구 다다미 방을 빌려 보름쯤 기거하면서 매일 J.R 선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전철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는데 어느 젊은 여자가 내 앞에 섰다. 그 여자는 배꼽이 완전히 드러난 달라붙는 티 셔츠를 입고 잇었다. 내가 앉은 위치에서 내 눈과 그녀의 배꼽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아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1989년이었으니까 당시 일본에서 도 첨단 패션이었을 것이다. 패션감각 따위와는 원체 거리가 먼 나였기에 무척 당황했다. 그리고 몇 해 뒤,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이 한창일 즈음, 서울 거리에서도 배꼽티 입은 여성들을 자주 보게 되었다. 이제,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나 홍대 앞이 아니더라도 어느 곳에서나 여성들의 배꼽을 볼 수가 있다. 수영장이나 대중목욕탕이 아니면 동성간이라도 어느 누구의 배꼽을 보기 어려운 일인데, 세상이 '확실히' 변했다. 물론 나는 일본에서처럼 당황했던 모습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우리 시대는 바야하로 '배꼽문화'라고 붙여도 될 만큼 배꼽 자체가 하나의 화두로 등장하였다. 서양 풍습을 따른 배꼽노출 패션이 장안을 메운다. 머지않아 코걸이, 귀걸이처럼 배꼽에 장신구를 매단 배꼽걸이 패션도 상륙할 조짐이다. 이제 '배꼽혁명'의 시대에서 '배꼽 섹스 어필'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조선시대 여인네의 저고리는 치켜올리면 젖무덤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배꼽 노출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들을 다산하여 '당당한 자격증을 얻은' 서민 여성들이 과김히 젖무덤을 드러낸 모습을 우리는 구한 말 외국인들이 찍은 사진에서 많이 보아왔다. 양반 부녀들이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유교사회라서 퍽이나 엄격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서민들의 경우에는 그 운신의 폭이 넓었다. 물론 이를 보고 아무도 섹시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배꼽 노출은 어떤 경우에도상상하기 어려웠다. 사람에 따라서는 배꼽을 여성 성기의 또 다른 상징물로 보고, 그야말로 '구멍'을드러내놓고 다니는 '말세'라고 논박하기도 한다. 이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선운사 마애불의 '구멍'에서 동학농민군들이 새로운 세상을 엿보았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육체의 열려진 '구명'을 통하여 또 다른 세상의 문을 들여다 보고 있다. 하긴, 프랑스의 '라베라시옹' 문화부장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쟝 뤽 엔니그는 전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엉덩이의 역사>에서 엉덩이 하나만 가지고 역사책을 썼다. 그러한즉, 누군가 '배꼽의 역사'를 통하여 '구멍' 이야기를 쓴다 한들 말릴 수 있겠는가.
오늘의 '배꼽문화'는 성적 훔쳐보기를 유도하는 문화다. 그래서 살짝살짝 은근히 드러내야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된다. 우리 시대의 성 개방은 노골적으로 벗은 토플리스 차림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영화나 술집문화를 즐길 정도로 열려져 있으면서도, 정작 백주 대낮의 거리문화에서만큼은 토플리스를 거부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여준다. 은폐된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하수구' 같은 성문화가 있음에 반하여, 공개적으로는 유교적 윤리의 잣대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패션디자이너들은 속도감 있게 다양한 배꼽패션을 선보인다. 그에 맞춰 우리의 젊은이들도 앞다투어 배꼽에 투자하며, 배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성형수술도 마다하지 않는다.
긴 배꼽을 동그랗게 해주세요 눌린 배꼽을 환하게 펴주세요 덮인 배꼽을 열어주세요
남성들도 성적 훔쳐보기를 유도하는 배꼽문화에 동참한다. 남성 인기연예인들은 저마다 옷을 벌리고 배꼽을 예사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 하여 일반적인 젊은 남자들 사이에 배꼽문화가 정착된 것 같지는 않다. 아직은 젊은 여성들의 전유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성만을 집중적으로 노출시키는 성적 훔쳐보기에서 배꼽이 맡은 역할은 그야말로 도 하나의 '구멍'이 아니겠는가. 경우에 따라서 젖무덤은 보여주어도 되는데 배꼽만은 안 되었던 전통사회, 배꼽은 보여주되 젖무덤 노출은 아직은 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오늘의 사회, 100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노출의 개념부터 달라졌다. 배꼽이 자궁으로 연결되고 배가 차가우면 부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일반상식을 생각해보면 배꼽 노출이 어쩐지 걱정이 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다시 혁명을 들여다보며
동학농민전쟁이 터진 1894년으로부터 꼭 1세기 뒤에 '배꼽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 이것도 무슨 암시가 아닐까. 열망과 욕망의 정도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이나 배꼽에서 혁명을 꿈꾸었던 그 시절이나 하수상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이 자리에서 배꼽 노출에 관한 도덕적 반대론이나 암묵적 지지, 혹은 적극 지지 따위의 객설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즈음 배꼽 노출을 바라보면서 나는 혁명, 혁세, 그런 것부터 떠올렸다. 배꼽과 혁명, 혹은 혁세, 그런 것부터 떠올렸다. 배꼽과 혁명, 혹은 혁세...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양자의 천연성을 따져보니 오늘의 배꼽문화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동학혁명 100주년과 배꼽 노출의 시대. 이 '부조화의 기묘한 일치'를 보며 문화의 패러독스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나는 새삼 문화의 천변마화를 보는 것 같아 마음 가득 씁쓰레함을 느낀다. 어쩌면 배꼽에서 태실이나 생명 탄생, 혹은 혁명을 읽는 내 의식구조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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