쩌우인라이 총리가 일본의 전쟁광들과 일본 국민은 별개라고 한 당시의 생각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이성적이고 미래지향적인생각이었다. 쩌우인라이는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일 우리가 일본에 대해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배상하라고 우긴다면 이 부담은 결국 일본 국민들의 어깨에 얹혀질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히데키 토조(東條英機)를 우두머리로 하는 극소수의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것이고 모든 일본 국민들 역시 이들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다.' 당시 모든 중국인들은 쩌우인라이의 태도-사실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 찬성하였다. 맞는 말이다. 우리 중국은 이처럼 대국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배상은 다음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양국이 계속해서 우호적인관계를 유지하고 이전과 같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전쟁의 배상이 일본 국민들에게 정말큰 부담이 된다면 우린들 이 돈을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갰는가? 우호적 중 . 일 관계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마음과 중국인 특유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주는' 사고는 유감스럽게도 모든 일본민족에게 어떠한 존중이나 이해도 받지못했다. 만일 우리가 당시 전쟁배상금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전쟁배상금문제는 다음으로 미루어 두었다가 차후 때를 기다려 다시 거론하여 결산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중국인의 속이 좁거나 변덕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현재 많은 사실들이 증명하듯이, 우리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다고해서 일본인들이 우리에 대해 진정한 우호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우호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 자구책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냇물 건너 이웃'이나 '같은 문자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항상 친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따뜻한 친밀감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은 적이 없다. 사실 전후 일본 전범들을 재판할 때 국제사회에서는 전쟁피해를 입은 국가들의 생명과 재산손실에 대한 일본의 배상액을 규정했었다. 그 중 중국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가장 많은 배상금을 받도록 판결되었지만, 실제로 확정된 배상액은 우리들이 입은 피해의 실제상황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문제점은 종종 역사의 진전과 국제관계의 변화로 점차 명확해지기도 한다. 잘못은 군국주의가 저지른 것이고 일본 국민들도 이들의 피해자란 말은 맞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자란 토양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민족모두가 국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이 없었다면 군국주의가 그렇게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모호한 과정'이 일본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했다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논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중국인이 군국주의와 국민을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것은, 바로 일본민족이 더욱빨리 전쟁의 상처와 절망과 비애에서 벗어나게 하고, 제대로 된 국가의모습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하며, 국교수립을 통해 같이 손을 잡고 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관용의 나무가 맺은 치졸한 돌연변이의 열매를 맛보게 되었다. 우리가 일본 국민에게 전쟁배상의 무거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소박한 생각은 중국인이 새로운 시대에 걸었던 희망을 앗아갔으며 또 우리 선배들의 피어린 상처는 상징적인 위로조차도 받을 길이 없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얻은 것은 고작 침략자를 내쫓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당시 전쟁배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현대화 속도는 더욱 빨랐을 것이며 국민들의 생활도 지금보다 훨씬 풍족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받아야 할 채무를 이행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이라는 죄인이 반성하는 절호의 계기를 만들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당시 전쟁배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일본이 거론하고 있는 대중국 차관에 관한 문제도 간단해졌을 것이다. 우리가 배상금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 일본이 마음대로 대중국 차관을 동결하는 수법으로 중국을 압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대중국 차관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죄악에 대한 일종의 배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은 중국이나 일본 모두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러한 각도에서 대중국 차관문제를 고려하지는 않고 있다. 만약 일본이이 문제와 연계하여 중국의 핵실험 포기를 요구한다면 이는 비열하기 그지 없는 행위로써 국제 정치무대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상 이야기한 내용은 모두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하찮은 권리를 포기하였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가정' 할 권리뿐이다.
2) 처신도 못하고 낮만 두꺼운 일본
1978년 중 . 일 간에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된 후 쌍방 간에는 무척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었다.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빵(胡濯邦)은 다음 21세기에도 양국이 화합하고 공존공영하길 바라며 직접 중 .일 간의 청년교류를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80년대 중반 3천 명의 일본청년이 중국으로와 중국청년들과 친목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중국의 신세대 지도자들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질곡을 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세계의 미래를 바라보고 중국이 가야할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로 3천 명의 일본청년들이 중국에 왔을 때 외형상으로는 조금 우쭐해 하는 면이 있긴 하였으나 가식적인 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시 쌍하이 화똥(璜)사범대학에 재직하고 있었다. 일본청년들이 쌍하이에 오기 전까지는 마치 무슨 중요한 경축일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교내를 청소하고 꽃을 꽂고 간단한 인사말이라도 주고 받기 위해 속성으로 일본어를 배우기까지 하였다. 학교 극단에서는 중 .일 우호를 주제로 한 연극을 준비하였다. 그때 쑴창은 극중에서 전쟁 당시 중국 부녀자를 강간하였으나 종전된 후 중 .일 우호관계에 전력을 다하는내용의 한 일본 노인 역을 맡았었다. 그는 몰입해서 연기하였고 무대를 내려와서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교내에서 모든 여학생들이 그를 피해다니는 등 그가 겪은 고통은 이루헤아릴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눈앞의 구름과 같이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우리가 가졌던 흥분은 냉엄한 현실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일본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중국 인민의 인권을 대대적으로 유린하고 박탈했던 나라가 무슨 자격으로 인권을 논하고 중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질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는다. 모두 알다시피 최근 일본 국내의 적지 않은 정계요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시아를 침략했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과서에 실린 소위 '중국으로 진출하다'는 표현은 일본인이 민간여객기를 타고 중국에 왔다는 뜻이란 말인가? 한 일본 병사가 중국의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공중에 들어 올린 사진을 보고도 일본 국내에서는 반성의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난징 대학살이라고? 3십만 명? 이거 일본을 모함하려는 계략 아니야?'라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아직도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실어 자신들의 억울함을 벗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아시아 각국의 압력으로 '망언'을 일삼는 고위인사들을 물러나게 하여도 망언은 끊이지 않았다. 왜 뒤에 오는 사람마저도 연거푸 망언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분명한 연극이며 그것도 명연기를 하는 연극임에 틀림없다. 현재 일본을 이끄는 정치가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과거의 역사는 인간이 창조해 온 것이다. 인간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 사를 다시 고쳐 쓸 수 있다'라는 신념에 가득차 있는 것 같다. '침략'은 '진출'로 바뀌었다. 일본군대는 분명 중국에 왔었다. 그 진출의 방식에 '모호'한 점이 있는 것이다. 또한, 난징 대학살사건 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는지 여러 번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고. 확실한 자료나 자세한 기록도 없다. 게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상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이 전범들의 망령을 추도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만 해도 그렇다. 이에 대해 중국이 거듭해서 언급한다면 이는 일본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일본이 가진 중국 국민의 인권에 대한 태도이다. 제6차 유엔인권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이 중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취한 행동을 일본이 추종하는 것은 더없이 교활한 짓이다, 같은 패전국으로서 독일이 반성하는 태도는 일본에 비해 훨씬 진지하고 성실하다. 어느 자료에 따르면 전후 여러 해 동안 독일은 몇십억 마르크를 자발적으로 내놓아 침략당하고 피해를 입은 국가들에게 배상하였고,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배상이 가장 컸다고 한다. 이는 독일인의 마음속에 지고 있던 빚을 더는 방법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독일에서 파쇼의 영혼을 부르는 짓을 했다간 법에 의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독일의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전세계가 보는 가운데 2차대전중 희생당한 폴란드인들의 영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행동은 결코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도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전세계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떤 일본 수상도 중국의 영토에 들어와 무릎을 끓은 적이없으며 어떤 정치가도 중국에 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한 행동으로 우리를 감동시킨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야스쿠니신사와 전범들의 위패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했으니까. 이상으로 우리는 일본의 인권 관 역시 '모호'하다는 확실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진심으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이 존중하는 것은 서구의 가치관과 서구의 대중국 전략일 뿐이다. 마치 그들이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하려 했을 때와 같이 미국이 앞서 달려가니까 황급히 뒤쫓아 갔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은 감히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려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국교정상화를 꾀한 일본인의 생각은 아주 실질적이고 긴 '안목'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야말로 잠재력을 가진 얼마나 거대한 시장인가? 당시에 중국인을 6억으로 계산했을 때 모든 사람이 일본산 신발을 한 켤레씩만 사도 6억 켤레가 된다는 계산이다. 국제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구미에는 얼굴을 내밀고 아시아에는 등을 돌리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자신들의 '처신'조차도 아주 모호하고 번잡스러워 아시아나 구미를 막론하고 어느 국가 하나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