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대만 북부와 남부 해역에서 유도탄의 보강된 성능을 또 시험하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 대만총통 리떵후이의 방미에 항의하기 위해 첫번째 유도탄 시험을 시작한 이후 중 미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대만은 근 반세기 동안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긴장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어 왔다. 최근에는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창궐하고 있으나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는 대만독립을 지지할 어떠한 근거도 찾아볼수 없다. 고산족(高山族)이나 산지인(山地人)으로 불리는 토착민을 제외한다면 대만은 15, 1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역사서에 등장한다. 당시 대만은 해적들과 중국, 일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지에서 온 상인들의 근거지였었다. 17세기 중엽 명조의 마지막 군인이며 모험가였던 쩡청꽁(鄕成功)이 대만으로 건너 와 당시 대만에 주둔하고 있던 네덜란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대만을 점령하여 통치권을 확립했었다. 1688년 청조가 수립되자 대만을 공격하여 쩡청꽁의 후예들을 축출하고 청나라에 병합시켰다. 이후 200년 간 복건성으로 귀속되어 있었다. 18, 19세기에 대륙의 복건성이나 광동성으로부터 많은 중국인이 이주해 와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의 후대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만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복건성이나 광동성에 살았던 그들의 조상과 민족, 언어, 문화면에서 다른 점이 거의 없다. 현대사에서 대만은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발생한 전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당시 일본은 부패한 청나라 정권을 침략한 후 대만과 펑후(澤湖)열도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이후 대만은 반세기 가까이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2차대전의 종전으로 비로소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배한 후 대만은 중국에 반환되었고 미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는 대만을 중국의 일부라고 인정하였다. 당시 많은 대만인들 역시이를 받아들였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대만의 국민당 통치는 짧게 끝나버렸을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국민당의 장지에쓰 정부는미국의 제7함대에 의존하게 되었고, 대만은 사실상 미국의 보호지역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 지지를 국민당 정부에 보낸 것은 결코 민주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50, 60년대에 장지에쓰가 이끄는 정부는 대만에서 전권을 휘두른 전체주의 정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당은 이제껏 국민당이 대만의 통치자라고 하지 않고 중국의 합법적정부라고 주장해 왔다. 이런 주장이 대만으로 퇴각한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을 것이다. 1972년 '중 . 미 합동성명'에서 대만문제는 중국 내부의 문제임을 천명하고 미군은 대만에서 철수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대만의 역사에서는 대만독립을 지지할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이 서태평양에서 끊임없이 군사력을 보강하고 있고 대만과 대륙은 모두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대만이 독립될 희망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대만이 가진 세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인정되어 대중화(大中華)의 틀 안에서 선진적인 정치 및 경제자치를 실현하는 상황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 역시 중국의 각 당파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 뿐이며 만약 미국 정부가 현실적인 국가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국내 당파싸움에 이용할 목적으로 중국 내정에 개입한다면 대만의 진정한 자치 가능성조차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