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어영대장이 정승 아들을 종사관으로 삼았으나 교만하고 방자하여 군율로 참형에 처하기 위해 잡아 가두었다. 종사관이 그 아비에게 살려줄 것을 호소하니 할말이 없다는 뜻으로 백지로 된 편지를 대장에게 전했다. 종사관이 크게 깨닫고 뒷날 서북지방의 변란을 목숨을 걸고 평정하고 모든 공을 이미 돌아간 어영대장에게 돌렸다.
교만한 종사관의 반란을 평정시켜 인재로 만든 이창운
이창운(1713~1791)의 본관은 함평이고 자는 성유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어영대장과 총융사에 이르렀다. 그는 닥쳐올 운수를 미리 헤아리는 식견이 뛰어났으며 장신다운 기풍이 있었다.
그 무렵 김재찬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창운이 그를 불러다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김재찬이 늘 교만한 마음을 품고 여러번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창운이 군중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
"오늘 종사관 김재찬을 군율로 참형에 처할 터이니 빨리 잡아오도록 하라."
김재찬이 그제야 몹시 두려워서 눈물을 흘리며 정승인 그의 아버지 김익에게 구원을 여쭙자 김익이 말하였다.
"네가 체통과 예의를 무시하고 교만 방자하게 굴다가 장막의 규율을 위반하였으니 난들 어쩌겠는가?"
한참 있다가 편지 한 장을 아들인 김재찬에게 건네주므로 김재찬이 그것을 가지고 군문으로 나아가니, 벌써 어영대장이 자리에 나와 있고 칼과 창을 든 군사가 정렬하여 위엄이 서릿발 같았다. 그런 가운데 군법을 집행하려 하므로 김재찬은 혼백이 흩어지는 듯 몹시 놀라고 당황하며 겁에 질려 엎드려 있다가, 그의 아버지가 준 편지를 간신히 대장에게 올렸다. 이창운이 그 편지를 뜯어보니 한 장의 공지로 아무 글자도 씌어 있지 않았다. 이는 바로 대장에게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창운이 뜻을 정하고 이렇게 영을 내렸다.
"내가 그대 아버지의 체면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 주니 크게 반성하라."
그를 영창에다 가두었다. 그리고는 이날부터 이창운이 밤이면 영창에 나아가 김재찬에게 평안도 안에 있는 군, 읍의 생긴 모양과 산천의 험준하고 막힘이며, 도로의 트임과 환곡의 총계 숫자며 표와 식량이 얼마인 것과 인구가 몇 만이나 되는 것, 그리고 군대 정원이 몇천 명이나 되는 것들을 낱낱이 빠뜨리지 않고 강독하도록 하고, 그 이튿날 밤에 다시 와서 그 전날 저녁에 안 말을 강론하게 하기를 비바람을 피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하였더니, 40여 일 동안 갇혀 있으면서 평안도 40여 고을에 대한 제반 사정에 능통하여 손바닥을 펴보듯 환하게 알 수 있었다. 이창운이 그제야 김재찬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늙은 사람이 국가의 중대한 일을 자네에게 부탁하니 자네는 충성을 다 하도록 노력하여, 국가로 하여금 위태로운 지경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게 하여야 하네. 내가 죽고 난 30년 뒤에 틀림없이 평안도 지방에서 변란이 있을 터인데, 국가에서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지가 이미 2백 년이 되었다. 태평 성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만약이라도 뜻밖의 변고를 당하게 되면 흙더미가 무너지듯 기와가 산산조각이 나듯 걷잡을 수 없는 형세가 전개될 것이다. 내가 온 조정을 두루 살펴보아도 세상을 제대로 다스려 변란을 안정시킬 인재로는 자네보다 나은 이가 없으니, 자네는 신중을 기하여 이 늙은 사람의 말을 잊지 않도록 하게."
그리고 난적을 막는 계책까지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평소 뛰어나게 총명하고 글을 잘한 김재찬이 그의 말을 하나도 빠뜨리자 않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얼마 뒤에 이창운은 세상을 떠나고 김재찬은 승진을 거듭하여 정승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순조 11년(1811)에 이르러 평안도 역적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조정에서 놀라 술렁거리자 도성 안이 들끓는 듯하므로, 순조가 대신들을 불러다 반란군을 섬멸할 대책을 강구하도록 명하였다. 김재찬의 집이 신문 밖에 있었는데 사자가 급히 말을 타고 달려와 빨리 대궐로 나오라는 왕명을 전하고 아울러 재촉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김재찬은 천천히 일어나 완만한 동작으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좀도둑은 응당 저절로 멸망할 터인데 하필이면 놀라고 소란을 떨어야 하는가?"
집안 사람이 가마를 내어 신속하게 대궐로 나가게 하니, 김재찬이 끝내 덮개가 있는 수레로 바꾸어 타고 일부러 빙둘러 남대문을 경유하여 종로에 이르러서는 하인들에게 더 천천히 가도록 경계하였다. 김재찬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도성의 사람들이 손을 이마에다 갖다 대고 서로 말하였다.
"정승이 저렇게 한가롭고 편안하게 생각하니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염려 할 일도 없을 듯하다."
도성 안팎이 드디어 안도하게 되었다. 김재찬이 대궐에 도착하여 여러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성상께서 옥체가 불편하신 지 한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므로 영이 임금에게서 나오면 백성들이 반드시 믿으려 들지 않을 터이니 왕대비(효의왕후 김씨)의 전지로 도성의 백성들에게 유시하고, 급히 진무대장을 정하여 도성 안에서 진영을 개설하고 우선 선봉장을 보내어 관서의 대장과 힘을 합쳐 역적을 격파하여야 합니다."
곧바로 낭관을 불러 방책과 전략을 상세히 일러주고 관서지방의 모든 정세와 사정을 막힘이 없이 도로와 산천, 인물, 풍토, 봉수, 성보, 군민의 많고 적음과 강하고 약함을 촛불로 비춰보듯이 척척 알아맞히니 지휘하는 손에 바람이 일 정도여서 반나절이 채 안 되어 모든 계략과 대비가 끝이 났다. 여러 원로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잠자코 보기만 하다가 말을 꺼냈다.
"각하께서 미리 이런 변란이 일어날 줄 알고서 익숙하게 연습해둔 것이 있는 듯합니다. 어찌하여 이처럼 신속하고 적절히 대웅하게 합니까?" 김재찬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미 30년 동안 미리 외우고 익혔습니다."
좌우에서 어리둥절해하며 그 까닭을 물었더니, 김재찬이 마침내 이창운의 일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두가 우리 사또께서 가르쳐 주신 덕분인데, 어찌 실낱 같은 공이라도 있겠습니까?"
물론 홍경래의 반란은 얼마 가지 않아 마침내 평정이 되었다.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의 뜻을 알고 있었던 채제공
채제공(1720~1799)의 본관은 평강이고 자는 백규, 호는 번암이다. 영조 19년(1743)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 12년(1788)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조가 늘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면서 가끔 흔하게 읽혀지지 않는 책 가운데서 제목을 내어 선비들의 학문 역량과 정도를 나름대로 재어 보곤 하였다. 정조는 늘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으로 글 제목을 내어 선비들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온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그 뜻을 모를 것 같았으나 오직 채제공만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 그 제목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정조는 이제는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제목으로 선비들을 시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영남의 어떤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려고 길을 떠났는데 어느 산 속을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키가 큰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이 자기 집에서 묵고 가라고 하기에 그대로 따라가 그 집에서 묵게 되었다. 밤에 그 사람이 선비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보이는 과거의 글 제목은 바로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일 것이니 그대는 미리 대비하시오." 선비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이란 어느 책에 나오는 글귀입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이는 어느 책에서 나온다느니 할 것 없이 그저 알기 쉬운 것일 뿐이오. 지금 성상께서 이 제목으로 많은 선비들의 공부한 정도를 가늠해 보려고 하는데,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이란 바로 목화인 것이오."
선비가 그제야 크게 깨달았다. 그 이튿날 선비가 그 사람에게 사례하고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글 제목을 보니 바로 산 속에 만난 그 사람의 말대로였다. 시험장을 가득 메운 전국 방방곡곡의 수많은 선비들이 글 제목을 이해할 줄 몰라 마음을 졸이고 애를 태우면서도 붓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선비만은 거침없이 답안을 써서 갖다 올리는 것이었다. 임금이 이상하게 여겨 그 선비를 불러다 물었다.
"누가 이 제목의 뜻을 가르쳐 주던가?" 선비가 과거 보러 오는 도중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아뢰었더니, 임금이 이렇게 감탄하였다. "이 사람이 죽어서도 재주를 부리는구려."
채제공은 남중(남인을 가리킴)의 뛰어난 인물이다. 젊어서 집안이 가난하였으며, 산사에서 글을 읽을 적데 부유하고 존귀한 집안의 자제들이 모두 그를 예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해가 저물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갈 때 이르러 서로 어울려 시를 읊으며 회포를 푸는데 채제공의 시는 이러하였다.
가을바람 불 제 해묵은 잣나무엔 새매가 새끼를 치고 눈 내린 달 빈 산에는 호랑이가 정기를 기르도다
모두들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들 비웃었는데, 어느 재상이 그 시를 보고서 그의 아들에게 말하였다.
"네가 이 시의 뜻을 알기나 하느냐? 새매는 가을에 새끼를 치지 않는 법인데 새끼를 쳤다면 그 모양은 범상하지 않을 터이니, 너희들이 매우 볼품없이 용렬함을 비유한 것이고, 눈이 내린 달 빈 산에 호랑이가 정기를 기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이 사람은 반드시 높은 벼슬에 올라 드러날 것이다."
채제공이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는데 붓과 먹이 없어 현직 재상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재상이 후하게 붓과 먹을 그의 앞에 내놓았더니 채제공이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개가 비록 가난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고 해서 각하께서 나로 하여금 손수 이 물건을 들고 들어가게 하십니까?"
이에 그만 현직 재상이 그에게 사과하고 하인을 딸려 보내어 필묵을 들고 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채제공이 문 밖까지 나오려고 하는데 그만 개가죽이 자기 옷 속에서 떨어져 나오고 말았다. 개가죽은 대체로 가난하여 솜옷이 없는 사람이 남에게 빌려서 등에다 대고 추위를 막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어 땅에 떨어진 것이었다. 채제공이 조금도 부끄러워 하거나 난감해하는 기색이 없이 재상댁의 하인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이것을 내 등에다 떨어지지 않게 잘 꽂아 주게."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반드시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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