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서(1633~1688)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이중이다. 영의정 이경여의 아들이다. 효종 1년(1650)에 진사가 되고 2년 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숙종 14년(1688) 동경연(동지경연사)으로서 야강에 참여했는데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면서 졸기 시작했다.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석한 대신들이 황공하여 그를 논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뜻밖에도 숙종은 그를 깨우지도 못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본시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니 술이 취했을 리는 없고.... 어쨌든 졸게 된 사연을 먼저 본인에게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밤이 깊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이민서는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 땅에 엎드려 벌을 청하고 자초지종을 임금께 아뢰었다.
"신이 지난해 정사년(1677) 광주 목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인 박광옥의 사당을 중수하고 김덕령을 함께 제향하도록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갑자기 피곤해지면서 졸음이 덮쳐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신이 광주에 초청되어 갔습니다. 새로 지은 사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신은 그들에게 후한 음식 대접을 받는 꿈이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숙종은 평소에 그가 지방 수령으로 나가면 선정을 베푼다는 소문을 익히 들은지라 즉시 그 날 광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명하였으며 조금 후에 그 보고가 올라왔다. 예측했던 대로 광주 사람들이 그가 목사로 있을 적에 베푼 선정을 잊지 않고 그를 위해 생사당(지방관이 선정을 했을 때 그 지방민이 은혜를 잊지 않고 그가 죽기 전에 세운 사당)을 세웠다는 보고였다. 이민서가 사국(실록청)에 있을 때 영유 군수로 있는 백씨, 중형인 죽서(이민적의 호)와 함께 동산에 올라가서 놀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곳을 학사대라고 불렀다. 또 신정은 서하옹(이민서의 호)을 설봉고송(눈 덮인 봉우리에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이라면 그의 고고한 인품을 평하였다.
한쪽 다리가 잘린 뒤 더욱 출세한 윤지완
윤지완(1653~1718)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숙린, 호는 동산이다. 판서 윤강의 아들이요 좌의정 윤지선의 아우다. 효종 8년에 사마시, 현종 3년(1662)에 증광문과에 그의 형 윤지선과 나란히 합격하였는데 형보다 윗등급인 을과로 급제하였다. 윤지완이 여덟 살 때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눈이 나리니 온 산천이 하얗고 하늘이 높다라니 해와 달이 밝구나
글재주를 본 어른들은 그의 장래에 기대를 걸었다. 언젠가 중국인 점쟁이에게 점을 치니 그 점괘 풀이로서 단지 '무족가관(발이 없어야 볼 만하다는 뜻)' 이라는 네 글자만을 써 주었다. 그의 재주가 그렇듯 높은데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병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자른 뒤에야 비로소 현달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역임했으며 청백록에 기록되었다.
시골 선비에게 속아 급제시킨 상사관 김진규
김진규(1658~1716)의 본은 광산이고 자는 달보, 호는 죽천이다. 김만기의 아들이자 인경왕후의 오빠다. 비가 오는 어느 날 김진규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 광성부원군이 우의와 말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김진규는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걸어서 돌아왔다. 그 꼴을 본 아버지가 까닭을 물었다.
"아비가 보내 준 말과 우의는 어떻게 하고 지금 너의 그 꼴이 무엇이냐?"
김진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보내 주신 것이 너무 사치스러워 저의 신분엔 맞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아버지 김만기는 오히려 자식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김진규는 시관으로도 이름이 나 있었으므로 과거를 준비하고 있는 거자(입시 지만생)들에게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고향으로 성묘를 갔다가 회시(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보는 과거, 복시라고도 함)가 임박하여 그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오는 길인데, 말을 타고 줄곧 책을 보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시골 선비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김진규가 점심을 먹기 위해 주막에 들렀을 때도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시골 선비를 만났다. 책을 그렇게 열심으로 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누구냐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저는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인데 과거운이 없는지 아무리 열심으로 공부하여도 번번이 낙방이어서 참으로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보고 있는 그 책은 무슨 책이기에 줄곧 손에서 떼지 않지요?" "제가 지은 글의 초고인데 요즈음 제 정신이 흐려져서 잘 잊어버리므로 늘 보아야 합니다."
김진규가 양해를 얻어 그 책을 펴 보니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으므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과거 공부가 이런 수준인데 여러 번 낙방을 하였다니 이것은 전적으로 유사 (담당 시험관)의 책임이오." "예. 하도 여러 번 낙방을 하고 나니 이제는 과거 공포증이 생겨서 과장(시험장소)에만 들어가면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모두 잊어버리므로 이렇게 항상 눈에 익혀 두어야만 한답니다. 사실은 이번에도 저는 응시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노친의 청이 간절하시어 부득이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선비의 말을 들은 김진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한 번만 더 노력해 보시오 공든 탑이 무너질 리 있겠소?"
그들은 길을 재촉하여 서울에 당도했으며 선비는 과장으로 들어가고 김진규는 상사관을 맡았다. 그 선비의 시권을 훑어보니 그 가운데 글자를 잘못 쓴 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김진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 선비의 것이다.'
김진규는 상시관으로서 다른 시관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이 시권을 살펴보니 늙은 선비의 글솜씨가 분명하다. 이번에 우리 시관들이 적선 한번 합시다."
다른 시관들의 동의를 얻어 김진규는 그 사람을 발탁하였다. 방을 붙이기 위하여 봉한 부분을 뜯어보니 나이가 별로 많지 않았다. '혹시 내가 엉뚱한 사람을 뽑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속으로 의아해 하다가 신은례(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찾아다니며 하는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물어 보았다.
"여러 차례 낙방 끝에 이렇게 급제한 것을 거듭거듭 축하하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그의 말이 전과 달랐다.
"아닙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 응시하였는데 요행으로 급제한 것입니다."
김진규가 다시 말하였다.
"이제 양친 봉양을 잘하게 되었으니 무척 다행일세 그려!" "아닙니다. 저는 양친이 다 안 계십니다."
"어찌하여 지난번엔 나를 속였느냐?" 그때서야 그는 머리를 숙여 사죄하였다. "이번 회시에 대감께서 상시관을 맡을 것이라고 짐작되어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급제를 급제를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으로 그만 저지른 일입니다. 저의 죄를 잘 알겠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명을 듣고 난 김진규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설프게 웃고 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