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욱(?~?)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문숙, 호는 학주다. 인조 초에 진사시, 인조 13년(1635)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 지평, 수찬 등 삼사의 벼슬을 역임했다. 황해 감사로 있을 때 날씨가 몹시 가물어 효종은 국정 전반에 대한 솔직한 비판과 건의를 전국에 널리 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개 천재지변이 있을 때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서 재난을 면한다는 염원으로 왕부터 몸과 마음가짐을 경건히 함은 물론, 온 나라안에 널리 알려 정치에 대한 좋은 의견이나 솔직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행한 왕가의 관례로 기우제를 지내는 일과 흔히 병행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 때 김홍욱은 왕이 금기하는 민회빈 강씨의 일을 구언상소장에 다음과 같이 새삼 거론하여 노여움을 샀다.
"한 여인에게 원한을 사면 3년간의 가뭄을 불러오고 슬피 우는 의로운 신하의 울음소리에 여름 서리가 내린다고 합니다. 지난날 강씨 일문의 억울한 죽음이 어찌 한 사람의 원한에 그치겠습니까. 천지의 온화한 기를 손상하고 지금 전에 없는 가뭄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극도로 화가 난 효종이 친국하였다. 본시 몸이 허약한 김홍욱이었으나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임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옛적에 훌륭한 임금들이 바른말 하는 신하를 벌주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임금이 선비를 죽였다는 후세의 비판을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신의 소망은 지하에 가서 옛 충신 용강과 비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효종은 분을 참지 못하며 말하였다.
"옛날의 용강과 비간이 너처럼 역적을 옹호하는 말을 했다더냐!"
그리고 끝내 김홍욱을 죽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 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직언한 김홍욱을 장하게 여겼다 뒤에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