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1501-1570)은 이해의 동생이고, 자는 경호, 호는 퇴계이다. 12세에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이우가 늘 그를 칭찬하였다. "집안의 명성을 유지시킬 자는 이 아이이다"
중종 23년(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원년에 대제학 박순이 아뢰었다.
"신이 대제학이 되고 이 아무개가 제학이 되었는데, 나이가 많은 큰 선비에게 도리어 작은 임무를 맡게 하고 신진 초학의 선비에게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게 하는 것은 조정의 인재 기용이 이보다 더 전도될 수 없습니다. 교체시켜 임명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 박순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이황과 박순의 관직을 서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이황이 대제학이 되어 '성학십도'를 올리고 선조 3년에 죽으니, 나이 70세였다.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으로 경계하였으며,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쓰게 하였다. 이황은 항상 도연명의 시를 애송하며 그의 사람 됨됨이를 사모하며 야당시를 읊었다.
이슬 젖은 고운 풀이 물가에 둘렸는데 연못의 활수는 모래 없이 깨끗하네 구름 날고 새 지나니 원래 서로 얽매어라 때때로 물결 차는 제비가 두렵다네
이황이 예조 판서의 임명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니, 이이가 찾아 뵙고 말하였다.
"어린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헤아려 보면 물러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도리로 보면 물러날 수 없다고 하겠지만 내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성혼이 참봉에 임명되었는데도 나오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성혼은 왜 나오지 않소?" 이이가 대답했다. "성혼은 병이 많아 감히 벼슬에 종사할 수 없을 것이오. 만약 그더러 억지로 벼슬하라고 하면 이는 그를 괴롭히는 것이오"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숙헌(이율곡의 자)이 어찌 성혼은 후하게 대접하면서 나에게는 그리 박하게 대접하오"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일신의 사사로운 계책을 염려해 줄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혼을 말단의 벼슬에 나아가게 한들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생께서 높은 벼슬에 계신다면 국가에 보탬이 매우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하는 것이지 어찌 자신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이 답하였다. "벼슬은 진실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약 이로움이 남에게 미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병통이 절실하게 되면 할 수 없는 것이오"
이황이 서울에 임시로 살 때에 이웃집에 밤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그 밤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와 밤이 달리고 영글어 뜰에 떨어지자 선생이 혹시 아이들이 그 밤을 주워 먹을까 싶어 주워서 담장 너머로 던져 버렸다. 그의 청렴결백함이 이와 같았다. 여러 차례 임금이 부르는 명을 내렸지만 진출과 은퇴를 의리로 하였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상하고 도덕이 순수하게 갖추어졌으며, 주자를 높이고 믿어 학문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체득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과 도산서당에서 유고를 강론하여 성취한 이가 많았고, 동방학자들의 학설을 모으고 크게 완성하여 우뚝한 이학의 마루가 되었다. 특별히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이고 문묘에 종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