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1533-1603)의 자는 사경, 호는 고옥이고, 정렴의 동생이다. 어렸을 적에 강가의 정자에서 놀다가 멀리 보이는 백사장 위에서 어떤 사람이 가로로 부는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시를 읊었다.
멀고 먼 모래 위에 있는 사람 처음엔 한 쌍의 백로로 의심했지 불어오는 바람결에 갑자기 가로 부는 피리 소리 들리니 해맑은 가락에 강과 하늘이 저무네
정작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수련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으며, 중년에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정욕을 끊은 지 36년 만에 타고난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
정작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감별하는 기술을 통달하여 기이한 경험이 많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쓰고 시 읊기를 좋아하였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정작은 백일하에서도 그림자가 없다고 하였다. 벼슬은 사평에 이르렀으며, 술을 즐기며 시를 잘하였고 또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신기한 효험이 나타난 적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우연하게 사기의 빌미로 고통스러운 병에 걸려 며칠 만에 고질이 되었는데 고옥이 약으로 치료를 하였더니 그 증세가 다섯 번 변하므로 그에 대응하는 약 또한 다섯 번을 변경하여 모두 효험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고옥에게 청원하였다. "내가 당신이 병을 고쳐준 그 사람과는 대대로 쌓인 깊은 원수 관계여서 이미 옥황상제에게 고하여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고 작정하고서 내가 다섯 번이나 그의 증세를 변경시켜 가며 당신의 약을 회피하였소. 그런데 당신은 줄곧 다섯 번이나 그 약을 변경시키면서 그를 낫게 하였으니 내가 앞으로는 당신을 이기지 못할 듯하오. 그렇지만 반드시 여섯 번 그의 증세를 변경시킬 터인데 당신이 만약 다시 새로운 약으로 그를 치료한다면 나는 당장 그 원수를 당신에게로 옮겨 당신을 따라다니며 빌미가 되겠소"
고옥이 깨어나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환자의 집안 사람이 급히 왔으므로 그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그의 병 증세가 정말 변경되었다는 것이었다. 고옥은 꿈에 나타났던 징조를 염려하지 않고 또 증세에 따라 투약하도록 명하여 마침내 그 사람의 병이 낫게 되었다. 대체로 사기가 사람에게 빌미가 된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몸을 보양하는 혈기가 허약함을 틈타서 그 사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이 좋은 약으로 잘 막아내기만 하면 사기가 그 틈새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다 고옥은 보통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사기가 감히 원수의 대상을 옮겨 정기를 침범하지는 못하였다.
고옥이 일전에 친구 서너 명과 여름에 모여서 대화를 하였는데, 짧은 처마로 내리쬐는 햇볕에 더운 기운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만약 호수 위에 있는 높은 다락에 앉아서 옷을 벗어 흔들며 발을 씻는다면 더위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별로 어렵지 않으니 당장 자네들을 위하여 그렇게 해보겠네" 고옥이 곧장 문 밖으로 나가 세숫대야에다 물을 붓고 부적을 넣은 다음 무어라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더니, 조금 있다가 뒤편의 창문을 열어 젖히고 친구들에게 그쪽을 보라고 하였다. 친구들이 그쪽을 보니 집 아래에 갑자기 호수가 생겼는데 너비는 1천 이랑쯤 될 정도로 넓고 아득하여 끝이 없었으며,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가운데 섬이 솟아 있는데, 채색을 한 다락집이 아스라하게 보이고 무지개 다리로 육지와 통하게 하여 완연히 그림 속의 거울 같았다. 고옥이 친구들을 데리고 무지개 다리를 거쳐 다락집으로 올라가니 연꽃 향기가 풍겨 오고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어와 황홀하기가 신선이 살고 있다는 낭원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타고 공중에 날아오르는 듯하여 청량관에서 한번 씻고 그치는데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선경에 있는 아이가 술잔과 소반을 받들어 올리는데, 좋은 안주와 맛있는 술이었다. 모두 실컷 마시고 취하여 조용히 할 이야기도 결렬하게 하며 술이 몇 순배돌자 그대로 물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서로 다락 속에서 상대방을 베고 날이 저무는 줄 몰랐다. 그러다가 깨어 보니 바로 낮에 앉아 있었던 조그마한 집이었으므로 친구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흩어졌다.
또 한번은 고옥이 그의 형 북창을 따라서 고향으로 가는데, 어느 산골 마을에 이르러 어떤 집 앞을 지나다가 나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애석하기도 하다. 저 집안이여" 북창이 타일렀다.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을 하는가. 잠자코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이미 말을 내뱉었으니 그 집안에 재앙이 그치도록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군자가 인을 베풀고 널리 구제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네 말이 옳으네. 나는 먼저 떠날 터이니 자네 혼자 가 보게" 고옥이 마침내 그 집에 들어가서 지나가는 나그네로 길을 잃고 날이 저물었음을 핑계 대며 하룻밤 묵어 가기를 요청하였다. 주인이 고옥의 외모가 헌걸차고 장자의 기풍이 있어 보이므로 즉시 허락하였다. 밤이 이슥하자 고옥이 주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까 주인집 문 앞을 지나다가 마침 상상하기 어려운 큰 재화가 닥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위하여 그 재해를 없애 주고자 합니다. 만약 내 말을 허탄하고 망령되다고 하지 않는다면 재화가 바뀌어 복이 될 것이니 주인께서 기꺼이 따라 줄 수 있겠습니까" 주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게 보셨다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빨리 백탄 수십 석과 큰 나무궤 하나를 장만하십시오" 주인이 즉각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백탄을 뜰 가운데다 쌓고 궤는 그 곁에다 두고서 관솔불로 백탄에다 불을 붙이니 타는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때에 그 집안 사람과 이웃 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경을 하는데 나이 가 6, 7세 쯤 되어 보이는 주인의 아들도 그 틈에 끼여 불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옥이 재빠르게 그 주인의 아들을 잡아 궤 속에 집어 넣고 궤 뚜껑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주인과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고옥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빨리 궤를 끌어다 이글거리는 백탄 위에 처넣게 하였다. 주인의 온 가족들은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모두 고옥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미 어쩔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단지 울부짖으며 통곡할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길이 그 궤를 태워 터지게 하였는데 비린내가 사람들의 코를 찌르므로 타는 궤 쪽을 보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불에 타 꿈틀거리더니 조금 있다가 몸을 휘감은 채로 죽고 말았다. 고옥이 종에게 명하여 타다 남은 불은 치우고 타고 남은 백탄의 재를 쓸어 모으게 하고는 몇 치쯤 되는 낫의 끝부분을 찾아내어 주인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이 물건을 기억하겠소?" "기억하고 말고요. 제가 10년 전에 연못을 파서 물고기를 길렀는데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물고기의 숫자가 불어나지 않고 점점 줄어들어 이상히 여겨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큰 구렁이란 놈이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화가 치밀어 그 요물을 없애 버리려고 큰 낫을 휘두르자 구렁이도 성이 나서 대가리를 쳐들고 요동하다가 낫의 끝부분이 구렁이의 몸통을 찔렀는데 구렁이가 버둥대는 바람에 낫 끝이 부러지고 구렁이도 죽었습니다. 이 쇠숱이가 그때 부러졌던 낫의 끝부분이 아닙니까?"
주인이 종을 불러 창고 속에 꽂아둔 끝이 부러진 낫을 가져오게 하여 맞추어 보니 바로 그 낫의 끝부분이었다. 그제야 주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놀라고 정작의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주인의 아들은 바로 구렁이의 독과 정기로서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니, 만약 며칠 더 지났으면 주인의 집안에는 엄청난 재화를 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기운은 먼저 드러나기 때문에 차마 그냥 지나쳐 버리지 못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만 이제는 염려할 것이 없으니 이해를 하신다면 다행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