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1540)는 지정 남곤의 동생이고, 자는 사미, 호는 지지당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라일이 날마다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일에 뜻을 끊고 청맹과니(당달봉사)라 칭탁하며 벼슬하지 않고 적성의 감악산에 숨어 항상 무명베 갓에다 해진 옷을 입고 국내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스스로 창랑거사, 소요자라고 일컬었으며, 가는 곳마다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아 세상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었다. 중종 16년(1521)에 비로소 감파동의 재사로 돌아와서 19년 뒤에 죽었는데 나이 82세였다. 그가 병이 나서 앓자 그의 아들 장령 남정진이 근무지인 곡산에서 돌아와 모셨다. 남포가는 아들에게 경계하였다.
"네가 여덟 번 고을 수령으로 임명받아 세 번은 사양하고 다섯 번 나갔던 것은 부모가 있음으로 해서 뜻을 굽힌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집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집이 있다. 집은 바람과 비를 가리기에 충분하고 토지는 죽이나 밥을 이어가기에 충분하니, 내가 죽은 뒤에는 다시 벼슬길에 나갈 계획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묘갈에는 단지 공조의 옛 직함만 써야 한다. 전한과 직제학은 살아서 취임하지 않았는데 죽어서 어찌 묘에다 쓰랴"
명종이 특별히 치하하며 옷감을 내려 주었다.
"고 직제학 남포는 평생토록 영리는 멀리하고 물러나는 데는 미련이 없었다. 그 절개를 이미 가상히 여겼거니와 그의 아들 남정진 또한 이와 같이 청렴결백하니 비록 옛날의 훌륭한 관리라 하더라도 이 사람들보다 뛰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