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연(?-1542)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거원, 호는 설옹이다. 문양공 성지의 손자로 중종 19년(152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왕 32년(1537)에 대사헌으로 있을 적에 참판 윤안인의 말을 듣고 하루 세 번 임금에게 아뢰어 김안로, 채무탁, 허항의 간사함을 배척하여 김안로 등이 사사되었다. 영상 윤은보가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뻔하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으니, 치하해야 합니다"라고 청하자, 논상하여 자급을 올려 주었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렀다. 양연이 젊을 때에 천성이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흔 살에 처음으로 글을 배울 적에 분발하여 결심했다. 그는 왼손을 꽉 움켜쥐고 "문장가가 되지 않으면 맹세코 손을 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가서 글을 읽었는데 한 해 남짓하여 문리가 관통하고 시격이 청고하였다. 그는 장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부쳤다.
글방에는 둥불빛이 어둡고 연지에는 물빛이 맑도다 붓은 내가 원하는 바이고 종이도 겸해 바라노라
이 시는 문방사우를 청하는 뜻이다. 그의 장인이 그 만학이 빨리 성취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장난 삼아 답하였다.
"양충의(충의는 양연의 애칭)가 마흔 살에 산사의 당에서 글을 읽으니 아! 너무 늦도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미담으로 전하였다. 뒤에 과거에 급제하던 날 비로소 손을 열어 보니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영조가 '양충의가 마흔 살에 산사의 당에서 글을 읽으니 아 늦도다'라는 글을 호당에 써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