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언량(1491-1560)의 본관은 풍덕이다. 중종 9년(15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청백한 관리로서 벼슬은 정2품의 한성판윤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무이다. 중종 때에 명 나라가 건주위를 치려 할 적에 우리 나라에서 군사를 징발하니, 이기를 도원수로, 장언량을 부원수로 삼고, 이조의 낭관인 임형수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임형수가 도원수인 이기를 찾아가 보고 어버이가 늙은 것을 이유로 종사관의 직을 사양하니, 이기는 "부원수 장언량에게 말하라"고 답하였다. 임형수가 곧 장언량에게 가서 뵈니, 장언량은 융복(군북)으로 청사에 나와서 교의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임형수가 급히 융복을 갖추어 입고 다른 종사관과 함께 서서 예를 행하고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고 물러났다. 얼마 뒤 명나라에 파병하는 일이 중지되어 가지 않게 되었다. 뒤에 임형수가 장언량을 찾아가니, 중문에 나와 맞이하여 읍하고 사양하며 자리에 인도하고 술을 베풀어 기쁨을 다하고 파하였다. 회재 이언적이 북방 변경인 강계로 유배되어 갈 적에 날씨는 춥고 옷을 얇았다. 장언량이 그를 길에서 만나 여우갖옷을 벗어 주었다. 을사사화 때에 이기가 사람을 시켜 장언량에게 말하였다.
"만일 내 말을 따르면 마땅히 큰 훈작을 얻게 될 것이오" "선인(아버지)의 정국훈(중종반정 때의 공훈)이 있으니 이것으로 이미 족하다"
장언량은 끝내 그를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 정이 중종반정 때의 원훈으로 하원군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