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한(1484-1555)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한지, 호는 기재이다. 영상 신숙주의 손자이다. 문장에는 능했으나 일처리 능력이 부족하였다.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소임을 빨리 처결하지 못하여 죄수들이 많이 적체되어 옥에 모두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신광한이 옥사를 더 넓게 지어 죄수를 수용하기를 청하였다.
"판서를 바꾸느니만 못하다. 옥사를 어찌 다시 짓는단 말인가" 중종은 허락하지 않고 허자를 대신 임명하였다. 허자가 지체없이 처결을 다하니 옥사가 텅텅 비어 새로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문장에는 어릴 때부터 뛰어났다. 고집이 센 종 하나가 신공을 바치지 않자 곧 시를 써서 짐짓 타일렀다.
평해군에 사는 종 막동이가 해마다 신공을 못 들은 척 바치지 않네 관청의 위엄으로 잡아오는 것 어려운 일 아니나 모름지기 내년 2월까지 바쳐야 하리
신광한이 소싯적에 채색 새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로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날로 늘었다. 장성하여 문형을 맡게 되자, 또 채색 새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 나함이 꿈에 오색 새를 삼킨 것과 같은 유라 하겠다. 중국 사신 장승헌이 왔을 때에 공이 원접사가 되어 주고받은 창화시가 있는데, 장승헌이 크게 칭찬을 하였다. 이듬해에 중국 사신 왕학이 공을 보고 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