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국(1478-1543)의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국경, 호는 모재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1등,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9년(1503)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중종 2년(1507)에중시에 급제하였다.
중종 26년(1531)에 일본 사신 붕중이 왔는데, 김안국이 선위사로서 영접을 주관하였다.
"노생이 중국에 두 번 조회하러 갔고, 유구에 두 번 사신으로 갔으며 귀국에 세 번 와서 외국 사람을 많이 만났으나 공과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붕중은 탄복해 마지않았으며, 귀국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우 정국과 함께 유림의 종장으로서 김안국은 이천에 물러나 살고, 김정국은 고양에 물러나 살고 있었다. 하루는 김정국이 이천 형의 집에 가니, 마을 사람들이 풋콩을 삶아 오기도 하고 혹은 오이를 따 가지고 와서 김안국에게 바쳤는데, 김안국은 그것을 모두 또박또박 책에 기록하였다. 김정국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형은 이런 물건들을 무엇에 쓰려고 받으며, 어찌하여 그것을 책에 기록합니까" "사람들이 성의로 보내 오는데 내가 어찌 그것을 물리치겠으며, 책에 기록해 두지 않으면 내 마음에서 곧 잊어버리게 된다. 어찌 남의 은혜로운 뜻을 버리겠는가"
시골에 살 적에 김정국은 간소하고 담박하여 나물과 잡곡밥도 이어 가지 못하였으나, 김안국은 전원을 장만하여 양곡을 쌓아 두고, 나누어주었다가 또 거두어들이며, 고을의 모임에는 꼭 참여하였다. 김안국이 전라감사가 되었을 적에 마침 전주에 있는 경기전을 중창하는 날을 당하여 경기전 대문 밖 조금 가까운 곳에 별도로 별당 두세 칸을 건축하였다.
인조 1년(1623) 계해반정 뒤에 정승 원두표가 정사공신으로 방백이 되어 경기전에 이르러 태조의 영정을 배알하였다. 이때 경기전 참봉이 기생을 불러 이 별당에서 같이 자고 있었다. 원두표는 그 별당을 철거해 버렸다. 그 뒤 나이 젊은 경기전 참봉들이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할 적에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생을 묵게 할 곳이 없어서 혹 재실에 몰래 끌어들여 같이 자기도 하였다. 김안국과 원두표 두 사람의 일처리에 대하여 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분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