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로(1481-1537)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이숙, 호는 보락당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원년(150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젊은 시절에 관동에 유람을 갔었는데, 어떤 신인이 나타나 시를 읊조렸다.
봄은 우임금 구주 산천 밖에 무르녹고 음악은 순임금 조정 금수 사이에 연주된다
신인은 이어서 말하였다.
"이것은 곧 네가 후일 출세할 길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듬해에 정시에 들어가니, 연산군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 시험을 치렀는데 '봄날에 이원의 제자들이 침향정 가에서 악보를 본다'란 제목으로, 압운은 '간'자였다" 김안로는 그 신인에게서 들은 시구가 합치된다고 생각하고 곧 그 글귀를 사용하여 써서 제출하였다. 고시관인 강혼이 대단히 칭찬하고 그를 뽑아 장원으로 삼았다. 모재 김안국이 시험관으로 참여하는 참시관이 되어 그 글을 보고 말하였다.
"이 시구는 귀신의 말이지 사람이 지은 시가 아니다"
김안로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사실대로 설명했다. 사람들은 김안국의 시를 보는 눈에 감탄하였다. 김안로가 소싯적에 중국 점쟁이에게 운명을 점쳐 보았다. 그 점쟁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주 귀하게 되기는 하나 다만 갈자 지명에서 죽게 될 것이다"
김안로는 중종 32년(1537)에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배척을 받아 진위현 갈현에 이르러 사사되었으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