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1478-1534)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택지, 호는 용재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고 중종 26년(1530)에 좌상에 이르렀다. 이행은 신장이 10척이고 얼굴이 네모지고 얼굴에 수염이 더부룩하였는데 시문에 뛰어났다. 남산 아래 청학동에 집을 짓고 자호를 '청학도인'이라 하였다.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퇴청하고 나서는 지팡이를 짚고 거니는데 그 쓸쓸한 모습이 마치 시골 늙은이와도 같았다. 어느 날 의정부의 아전인 녹사가 어둠을 이용하여 기별을 전할 적에 어떤 사람 하나가 짚신을 신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어린 동자를 거느리고 청학동 어귀에서 나오므로, 말을 타고 지나면서 물었다.
"정승이 있는가?" "기별을 전하려는 것이냐? 내가 여기에 왔노라"
녹사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졌다.
이행이 한번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가 되었다. 중국사신이 이행의 못생긴 모습을 보고 예를 잘 갖추지 않다가 그가 화답한 시를 보고서야 비로소 깊이 감복하였다. 그가 자기 부사에게 편지를 써서 주며 당부하였다.
"이 사람은 시단의 노장이니, 절대로 가벼이 시를 짓지 말라"
김안로가 모함하여 함종으로 귀양보내어 유배지에서 죽으니, 나이 57세였다. 시호는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