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기묘사화가 일어나 채세영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조광조 등 당인들을 죄주는 전지를 쓸 적에, 채세영이 조광조 등의 처벌이 부당함을 극력 간하니, 승지 김근사가 채세영이 쥐고 있는 붓을 빼앗아 멋대로 쓰려고 하였다. 그러자 채세영은 그를 몸으로 막으며 큰 소리로 항언하였다. "이것은 역사를 기술하는 붓이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영욕이 번복되는 일생을 살았던 정광필
정광필(1462-1538)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사훈, 호는 수천이다. 성종 23년(1492)에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성균관학유에 보임되고 녹사, 직장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는데, 작은 벼슬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직무에 이바지하였다. 좌의정 이극균이 그를 한번 보고 재상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이극균이 성종실록 총재관이 되자 정광필을 도청으로 발탁하여 편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이로부터 출세의 길이 크게 열렸다. 정광필이 탁영 김일손과 함께 호남, 영남 어사의 명을 받고 용인을 지나면서 같은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탁영이 시사를 강개히 비판하는데 과격한 말이 많으므로, 공이 누차 그를 말렸다.
"그렇게 과격하게 말하면 안 되네" 탁영이 분연히 말했다. "사훈이 이런 비열한 논의를 하다니. 어찌 갑자기 기개와 절조가 없는 썩은 선비가 되려는가"
정광필이 암행하여 진도에 도착했는데, 벽파정에 이르러 짐짓 느긋하게 지체하며 해가 저물었음을 핑계하고 나룻가 여관에 유숙하였다. 나룻가 백성이 정광필이 비상한 인물임을 정탐해 알고 관아에 달려가서 이를 알렸다. 진도 군수는 각 담당 아전에게 명령하여 밤새도록 장부를 정리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튿날 저녁 무렵에서야 천천히 진도군 관아에 들어간 정광필은 오직 공용의 숟갈 몇 벌을 조사하고 돌아왔을 뿐이었는데, 그 군수는 죄를 받아 파면되었다. 어떤 사람이 암행어사가 조사를 천천히 시행한 까닭을 물으니, 정광필이 말했다.
"진도군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고, 군수 또한 무관이므로 반드시 법규 이외에 횡령한 것이 많을 것이다. 만일 곧바로 관아에 들어가서 문부를 수색하여 잡아내면 저 군수의 죄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는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 아량에 감복하였다.
연산군 때에 소를 올려, 여색과 사냥이 너무 과도함을 간하였는데 기탄없이 범하는 말이 많았다. 연산군이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네가 어찌 나를 망국의 임금에 비하느냐?"
연산군이 역사에게 명하여 정광필의 머리를 꺼둘러 내려서 그를 치게 하고, 자신은 칼집에 든 칼을 가져다가 무릎 위에 얹어 놓고 명하였다.
"내가 칼집에 든 칼을 다 뽑는 것을 보거든 곧 처형하도록 하라"
이어서 천천히 칼을 뽑는데, 서릿발 같은 칼날이 사람을 비추어서 번쩍번쩍하며 거의 다 뽑혀 나오니 옆에서 왕을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었고, 역사는 바야흐로 도끼를 들고서 그 칼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광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 한치의 착오도 없었다. 연산군은 칼을 도로 집어넣으며 감탄하였다. "참으로 열사로다" 연산군은 그를 마침내 아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 법령이 준엄하여 귀양간 사람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정광필은 빗자루를 들고 관청의 문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 싫어하거나 괴로워하는 빛이 없었다.
중종 즉위년(1506)에 함경도 관찰사로서 찬성이 되었다가 얼마안 가서 정승이 되었다. 동왕 14년 겨울에 공이 북문의 변고(기묘사화)를 혼자 당하여, 벽력 같은 임금의 위엄을 범하여 가면서 형벌을 완화하도록 간청하였다. 그 때문에 사림이 어육이 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의 하루 전 새벽에 남곤이 해진 갓과 거친 베옷을 착용하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정광필의 집에 와서 문지기를 불러 말하였다.
"급히 들어가서 손이 왔다고 말하여라" 문지기가 남곤임을 알고 들어와서 고하였다. "손이 문 앞에 당도하였기에 그 얼굴을 보니 남 판서입니다. 그런데 의복과 갓이 초라하여 천인처럼 보입니다" 정광필이 나가서 보니 과연 남곤이었다. "공이 어찌하여 이런 모습이오?" 이상히 여긴 정광필이 묻자, 남곤이 그런 차림을 하고 온 까닭을 다 말하였다. "이 신진사류들을 만일 한 사람이라도 남겨 두면 그 해독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상께서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할 것이니, 공은 주상의 뜻을 힘써 따라서 그들을 남김없이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뒤에야 국가의 형세가 안정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위협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달래기도 하였다. 정광필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그대가 재상으로 천인의 복장을 하고 거리를 지나서 왔으니, 아주 놀랄 만한 일이오. 또한 사림을 해치기를 도모하는 것은 본디 내 의사가 아닌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는 거요"
남곤이 크게 노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날 밤 2고에 임금이 신무문을 열고 여러 재신들을 불러들였다. 정광필은 수상으로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왕을 대할 적에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였다.
"젊은 선비들이 시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옛일을 인용하여 오늘날에 시행하려 하였을 뿐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너그러이 용서해 주소서"
말할 적마다 눈물이 흘러 옷자락을 적시니, 임금이 벌떡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정광필은 왕을 따라가서 어의 자락을 끌어당기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계속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공은 또 남곤 등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공들이 성주를 보필하면서 어찌 유자광의 일을 행하려 하는가" 정광필은 정승 신용개와 친밀한 금란지교였다. 주상이 정광필에게 물었다. "경에게 벗이 있소?" 정광필이 대답하였다. "신은 다른 벗이 없고 오직 신용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후일 신용개가 왕에게 들어가 대할 적에 임금이 또 그에게 물으니 신용개가 대답하였다. "정광필이 곧 신의 벗입니다" "두 사람은 지기지우라 할 만하다"
기묘사화 때에는 신용개가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정광필이 탄식하였다.
"만일 신공이 있었으면 반드시 이 화를 진정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가 일찍 죽어서 나로 하여금 혼자 담당하게 하였다"
당초 현량과를 설치하려 할 때에 정광필이 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현량과의 명목이 좋기는 하나, 삼대(하, 은, 주) 이후에는 진실로 시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종이 듣지 않고 시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온 조정이 그 현량과 파하기를 청하되, 정광필이 홀로 파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자 임금이 물었다.
"경의 소견이 매양 시의와 서로 반대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신이 당초에 굳이 불가하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이미 현량과를 설치하여 홍패(대과의 합격증서)를 주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니 어찌 파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를 설치하고 파하는 것은 국가의 정령이니 이처럼 전도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임금은 끝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어 정광필은 정승의 직에서 파면되었다.
중종 22년(1527) 남곤이 죽자, 다시 정승이 되었다. 김안로가 정권을 잡자, 정광필을 죄를 얽어서 죽이려는 속셈으로, "정광필이 일찍이 희릉총호사(희릉은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임)가 되어 선후(장경왕후)를 좋지 못한 곳에 장사지냈다"고 얽어 죄를 만들어 중형에 처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김해로 귀양 보내도록 명했다. 정광필이 이보다 앞서 이미 벌을 받아 파직되어 회덕현에 돌아가 있었는데, 뜻밖에 의금부 도사가 급히 달려왔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놀라 눈물을 흘렸지만, 정광필은 바야흐로 손님과 육박(쌍륙) 놀이를 하면서 호로를 그치지 않았다. 육박놀이를 마치자, 유배의 명을 반포하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성상의 은혜가 지극하십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자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이튿날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날 적에도 말이나 얼굴빛에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정광필이 젊을 적에 꿈에 시를 지었다.
비방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되 마침내 용서받았으니 이승에서는 임금 은혜 보답할 길 없구나 높은 재 열 번 넘으니 두 줄기 눈물이요 큰 강 세 번 건너니 홀로 혼이 끊어지네 아득히 높은 산에는 검은 구름 피어오르고 망망한 큰 들판에는 항아리 쏟듯 비가 오네 저물녘에 바닷가 동쪽 성 밖에 투숙하니 초가집은 쓸쓸하고 대나무로 문 만들었네
비가 오는 가운데 유배지에 당도해 보니 그 정경들이 모두 꿈에 지은 시의 내용과 같았다. 유배지에서는 화가 조석 사이에 박두해 있어 자제들은 다 공의 배소에 문안을 오고 오직 부인이 집에 있어 울부짖으며 여종을 시켜 원계채에게 소식을 탐문하게 하였다. 원계채는 곧 연혼한 처지이다. 원계채는 알아볼 방법이 없어서 점쟁이 김효명을 불러 점을 쳤다.
"아직 10여 년의 복록이 있으니 조정 의논이 준엄하기는 하나, 마침내는 반드시 무사할 것이다" 점쟁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처벌을 주장하는 대간의 논의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 여종이 점쟁이를 붙들고 가슴을 치며 부르짖었다. "일이 이미 이와 같은데 네 말은 무슨 뜻인가?" "나의 술법대로 추산해 보면 이런 이치는 만에 하나도 없는데, 벌써 이렇게 되었으니, 난들 어찌하겠는가" 감효명은 재빨리 달아났다. 조금 뒤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대간의 계청이 윤허를 받았는데, 대간이 이미 흩어진 뒤에 '죽음에서 감형하라'는 전교가 특별히 내렸습니다"
중종 32년(1537)에 김안로가 세력을 잃자 임금이 공을 영중 추부사로 불렀다. 하인이 저보(관보)를 가지고 급히 달려 밤중에 배소에 이르렀는데, 발이 부르트고 입이 말라서 쓰러진 채말을 하지 못하였다. 자제들이 두려워하며 주머니를 뒤져서 글을 보니 기쁜 소식이었다. 곧바로 아뢰니, 공은 다만 "그러냐?"라고 할 뿐, 그대로 코를 골며 달게 잤다. 이튿날 아침에 그 글을 보고 도성으로 돌아오니, 도성 사람이 이마에 손을 얹고 반기며 기대하였다.
정광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식사할 적마다 그 남은 밥상을 오직 손자 유길과 증손자 지연에게만 주어 먹게 하고다른 자제들은 끼지 못하게 하였다. 가까운 친척 조카인 이헌국이 문안을 드리자, 공이 바야흐로 식사를 마치며 자세히 살펴보고 그에게 거두어 주었다. 여종이 눈짓을 하며 말했다.
"이분도 정승이 될 것인가"
과연 뒤에 그도 정승의 지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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