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희(1451-1497)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번이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9년(147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수찬으로 임명되자 대간이 권경희의 아내 김씨의 집안이 미천하다는 것을 들어 논박하였다. 권경희의 아버지가 그 사실을듣고 그 며느리를 버리도록 핍박하였으나 권경희가 사직하며 말씀드렸다.
"어찌 차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10여 년 동안을 함께 가난한 생활 속에서 고생하며 밤낮으로 오늘이 있기를 바랐었는데, 지금에 와서 버린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그렇게 못할 짓을 해 가며 높은 벼슬에 등용될 수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이 어찌 못할 짓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보다 낫다고 하겠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이 말을 의롭게 여겨 역시 며느리를 버리라고 강권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또 논박을 하였으나, 임금이 감싸주며 대간의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경희가 공명을 구하지 않고 그의 아내를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그야말로 훌륭한 선비이다"
그러자 권경희의 처가인 김씨 집안에서 조정에 진상을 보고하여 그들의 신분이 미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져 마침내 높은 벼슬에 등용되었다. 권경희의 장인은 김치운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권경희는 하정사로 명나라에 가서 중국의 예악을 터득한 바가 많았는데 그가 돌아오자 모두들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학식이 부쩍 향상되었다고 하였다.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