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1454)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자외, 호는 애일당이다. 태종 16년(1416)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2년(1452)좌찬성에 올랐으며 곧 우의정에 올랐다. 계유년(1453)에 황보인 등이 죽음을 당하자 정본은 낙안에 유배되었다가 곧 변방 지역에 안치되었다. 정본이 전경체찰사(지방에 병난이 났을 때 왕을 대신하여 평정의 임무를 띤 임시 벼슬)로서 영남으로 가는 길에 용안역에 닿았는데 거기서 자기를 잡으러 온 관원을 만났다. 정본은 즉시 말에서내려 인사하였다.
"길에서 형벌을 받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역관사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관원이 말하였다. "귀양지까지 갑시다" 정본은 다시 재배하고 나서 물었다. "그러면 나를 살려주는 것입니까?" "..."
그때부터 같은 길을 가면서 열흘 동안 그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그 관원은 옛날에 함께 있던 동료였다.
"정본과 허눌은 안평대군 용의 당 조극관과 모의하여 병권을 장악하였으니 그 죄가 황보인에 못지 않다. 마땅히 같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헌납 김계우가 이렇게 주장하였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단종 2년(1454)에 사사되었다. 정본이 귀양소에 있을 때 늘 선대의 사판을 모시고 있었는데, 하루는 따라온 승려를 시켜서 밥을 짓게 하고 제사한 뒤에 그 사판을 태웠다. 그리고 곧 사약을 받게 되었다. 죽음에 임해 아내가 그의 옷자락을 당기며 슬피 울자 정본이 아내에게 말했다.
"조정의 명령이라 거역할 수 없소. 나 죽은 뒤의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그는 또 사약을 마시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고 한탄하였다.
"나에겐 두 마음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변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가 죽자 갑자기 소나기가 몰아쳤고 하늘에 흰 무지개가 섰다. 그의 아내 변씨는 정본의 오촌 조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