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란(1331-1402)의 본관은 청해이고, 자는 식형이다. 본래의 성명은 퉁두란이었다. 그는 용맹스럽고 힘이 셌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했다. 대대로 여진 부락에서 살았는데, 원나라 말 나라가 매우 혼란하자 가족을 데리고 강을 건너 북청에 와서 살았다.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서로 만났는데, 첫눈에 의기가 투합하여 숙식을 함께 하였다. 고려 우왕 때 일이다. 어느 날 활쏘기로써 여러 장수들이 실력을 겨룬 적이 있었다. 세 차례 시합에서 태조가 번번이 일등을 하자 지란이 그 실력에 감탄하면서 그 실력을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당부했고, 태조도 이를 매우 고맙게 받아들였다.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미워서 태조가 영흥으로 갔다가 풍양으로 돌아오자 지란은 상소하여 중이 되겠다고 한 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수염만은 깍지 않고 두었으니 대장부의 표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두문불출한 채 여생을 보냈다. 72세 때 목욕하고 앉은 채로 죽었다. 그는 아들들이 조정에서 돌아오기 전에 화장하여 그 사리로 탑을 만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들들은 그의 의관을 가지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선조 25년(1592) 이전에는 아무도 소나 말을 타고 감히 그의 묘 앞을 지나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지란이 북쪽으로 돌아가던 날 태조에게 이렇게 상소했다고 한다.
"임금을 도와 나라를 정하니 군신의 의가 정해졌고,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니 군신의 의가 끊어졌소"
그 상소문 속에 자기의 상투를 잘라 바쳤으므로 태조가 도저히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허락하였다고 한다. 지란은 건주 정벌의 공으로 청해백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고 개국 공신 일등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양렬이며, 태조의 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