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린(1338-142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자수, 호는 독곡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은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데, 태조가 창업할 때 가장 공이 많았다. 계비인 신덕 강씨의 소생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정도전이 방석에게 아부하여 방원을 해치려 하였다. 이 음모를 알게 된 방원은 선수를 쳐서 군대를 동원하여 정도전을 죽이고 방석을 폐출시켰다. 화가 있는 대로 난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밤중에 함흥 관저로 떠나버렸다. 이때부터 문안사자가 잇달아 함흥으로 갔지만 가는 족족 다 죽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일러 '함흥차사'라고 부르는 말은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더이상 함흥차사로 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자 성석린이 자원하고 나섰다. 태조와 친분이 있는 그는 자기가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오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태종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는 무명옷에 백마를 타고 떠났다. 함흥에 도착하자 그는 말에서 내려서 나그네가 하듯 밥을 지었다. 밥짓는 연기가 나자 멀리서 바라보던 태조가 그에게 환관을 시켜 물어 왔다. 성석린은 환관에게 "볼일이 있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말도 먹일 겸 투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환관이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태조가 반갑게 그를 불러들였다. 석린은 조용하게 인륜의 중요함을 말하고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개진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며 물었다.
"너는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설득하려고 왔느냐?"
겁을 먹은 석린은 엉겹결에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 말씀이 거짓이라면 제 자손은 반드시 장님이 나올 것입니다"
어쨌든 태조는 그 말을 믿고 마음을 돌렸으며 아들 태종 임금과 화해하게 되었으나, 문제는 성린의 집에서 생겼다. 그의 맏아들 지도는 장님이고, 둘째인 발도는 자식이 없고, 지도의 아들 창산군 귀수와 귀수의 아들이 모두 뱃속 장님이었다. 성린의 벼슬은 영상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