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한(1376-1443)의 본관은 교하이고, 자는 유린이다.어릴 적부터 행동이 어른처럼 점잖았다. 뒤에 여흥부원군민제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삼도 염찰사(암행어사)가 되어 해주군에서 전함을 만드는 일을 오랫동안 감독하였다. 그는 서울로 복명할 때 전함 만드는 역졸들이 피부병에 걸려 몸에 벌레가 생겨 고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들은 임금은 얼굴빛을 바꾸며 화난 어조로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진시황이나 수양제 같은 폭군이란 말이냐?" 노한은 갓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하였다. "신이 염찰사의 명을 수행한 이래로 오직 백성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하여 왔는데 삼도 해변의 역졸들이 겪는 고통은 더없이 비참하므로 신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보고 드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웃으며 그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했다. 그후 벼슬이 이조 판서에 올랐다. 태종 9년(1409)에 동서 민무구의 옥사가 일어나서 양주로 낙향하였다가 14년 후인 세종 4년 부인 민씨가 입궐하여 사례 인사를 올리자 임금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