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1363-1452)의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구부, 초명은 수로, 호는 방촌이다. 고려 우왕 기사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조선의 이름난 재상이다. 시호는 익성이고, 죽은 뒤에 세종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그는 나라일에만 힘을 기울이고 집안 일은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집안에 있는 여종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여종이 와서 호소하였다.
"저 계집종과 다투었는데 저 계집종은 매우 간악합니다" "네 말이 맞다"
이번에는 다른 계집종이 와서 역시 이 계집종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네 말이 맞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카가 못마땅한 말투로 말하였다.
"아저씨의 흐리멍텅함이 너무도 심합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저 아이는 저렇게 말했으니, 이 아이가 옳고 저 아이는 옳지 못합니다"
그는 역시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말도 맞다"
황희는 때도 없이 글을 읽되 결코 자리를 구분하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밭에서 일하다가 왕명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는데, 쓰고 있던 삿갓과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입궐하였으므로 행색이 매우 초라하였다. 태종이 세종에게 위촉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런 사람이 있어야한다"며 즉시 예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는 정승으로 30년 동안 있으면서 이미 있는 제도를 힘써 따랐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일을 처리할 때는 순리를 따랐고 도량이 넓어서 일을 처리함에 대신의 체모를 잃지 않았다. 세종도 그 사려 깊은 행동과 신중한 일처리를 늘 칭찬하였다. 어쩌다가 옛 제도를 변경할 경우에는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임기응변의 재주가 없어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은 감히 논의할 수가 없나이다"
그는 이론이 공평하고 항상 일처리가 너그러웠지만 큰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시비를 가리는 데 과감하여 아무도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벼슬을 내놓은 뒤에도 국가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황희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은 뒤에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90세의 나이에도 총명한 머리가 감퇴되지 않고 모든 제도와 문헌을 환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도량이 너그러워 감정을 좀처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평소 생활을 보면 자손들과 종의 아이들이 항상 모여 시끄럽게 하여도 그것을 금지하는 일이 없었으며, 어떤 때는 아이들이 수염을 당기고 볼을 때려도 그대로 다 받아 주었다. 한번은 낮은 관리 하나를 옆에 두고 붓에 먹을 적셔 편지를 쓰는데 남자종 아이가 그 서류 위에 오줌을 쌌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고 그 오줌을 말없이 닦아 냈다. 하루는 여자종이 반찬을 들고 공에게 기대서서 관리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술상을 내오리까?" "천천히 차리거라" 비스듬히 서 있던 여종은 불손하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그리 늦지요?" 할 수 없이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차려 내라"
술상이 나오자 남루한 옷과 맨발로 아이들이 몰려들어 공의 옷을 밟고 깔고 앉아 그 반찬을 손으로 다 집어먹고 어떤 아이는 손으로 공을 툭툭 치기도 하였지만 공은 "아이고 아프다. 아이고 아프다" 할 뿐이고 아이들을 꾸짖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종의 아이들이었다. 밥을 먹을 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공은 아이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곤 하였다. 종들이 간혹 잘못을 저질러도 매를 치는 일이 없으며 종들도 사람인데 학대하면 안 된다고 늘 말하였다. 뜰 앞에 붉게 익은 복숭아를 이웃 아이들이 와서 따먹으면 공은 부드러운 소리로 아이들을 타일렀다.
"애들아, 다 따지는 말아라. 나도 맛은 봐야지"
조금 후에 나가 보니 복숭아는 하나도 없었다. 한번은 정원을 거닐고 있는데 이웃 아이가 돌을 던져서 잘 익은 배가 땅에 가득 떨어졌다. 공이 소리쳐 종을 부르자 돌을 던진 아이는 담밖으로 도망쳐서 몰래 엿듣고 있었다. 종이 오자 그에게 떨어진 배를 주워 도망친 아이에게 주라고 하고 나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공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공무를 보았는데 당시 김종서는 공조 판서였다. 그가 공조의 관원들을 시켜 술상을 차려 와서 대접을 하자 공이 벌컥 화를 냈다. 공은 공조 판서 김종서를 앞에 불러 준엄하게 꾸짖었다.
"국가가 예빈시를 정부 옆에 두는 것은 정승들을 위해서이다. 만약 우리 정승들이 배가 고프면 예빈시를 시켜 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공조가 이 음식을 차리느냐?"
정승 김극성이 이 일을 경연석에서 임금께 아뢰니, 세종은 "대신이면 마땅히 그래야만 백관을 통솔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황희 또한 김종서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