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고월과 소월의 자살 - 이장희 / 김소월
이장희(李章熙) 1900-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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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金素月] 1902∼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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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금붕어만 그리다 극약을 마셨을까 - 이장희
고월 이장희는 1900년 11월 9일, 대구의 부호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바 있는 이병학의 세 부인 중 첫 번째 부인한테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의 경도중학교를 졸업.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12남 9녀),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여 항상 일본인과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받기와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직전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어두운 방에 갇혀 하릴없이 금붕어 만을 그리다가 29세를 일기로 극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고월은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고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오상순)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 달 전에 동래에 가고 없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뜨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간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 듯하여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공초의 술회).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
왜 하필 금붕어를 그렇게 많이 그렸을까? 어쩌면 그것은 어항처럼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는 무기력한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자방이 커지면 화판이 떨어지듯, 가을이 깊어지면 잎사귀가 흩어지듯이 이렇듯 그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아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와 그의 고독과 그의 시가 완전히 합체되었을 뿐이다. 아아 그는 마침내 그 돌아갈 바에 돌아갔을 뿐이다. 나는 다시 무엇을 슬퍼하랴. 그러면 그의 죽음은 무엇이냐? 그것은 그의 최후의 시였다. 그 최대의 걸작이었다. 김영진은 친구 고월을 추억하며 이런 글을 썼다(1929. 11. 11. 중외일보 기재).
초췌한 얼굴에 초라한 옷차림, 언제나 문학서적을 한 권쯤 옆구리에 끼고 처마 밑으로만 다녔다고 하는 고월. 그는 스스로 닫힌 공간에 유폐되어 시 말고는 달리 구원이 없었을 것이다. 뼈를 깎듯 시의 일구일자에 매달렸다고 한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시적 직관, 탐미와 우울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우수의 색조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자살하기 4년 전에 그는 달밤 모래 위에서 라는 시를 썼다.
자빠진 청개구리의 불룩하고 하이얀 배를 보고 야릇하고 은은한 죽음의 비린내를 맡는다.
그가 죽기 몇 해 전, 일본의 아꾸다가와(개천)가 자살했을 때 고월은 유서란 것은 이미 현세에 대한 미련을 표시함이 아니냐? 그렇다면 현세에 미련을 가진 자가 무슨 자살의 필요가 있는가? 비록 자살의 용기는 가하나, 그가 남기고 간 일편의 유서는 유감이다. 라고 험절하였다. 그러나 아리시마다께오의 자살에 대해서는 무사기한 천진스러움 이라고 칭찬했다. 평소 그의 생각이 이와 같았기에 고월은 사진 한 장은 물론이요, 자살에 대한 한 마디 유언도, 반구의 유서도 없이 떠났음은 물론이다.
아내도 모르던 소월의 아편자살
민요시인 김소월 별세, 33세를 일기로 귀성군 서산면 평지동에서 한가히 향촌생활을 하던 소월 김정식씨는 지난 12월 24일 오전 8시경, 33세를 마지막으로 별세하였다. 소월은 일찍 배재고보를 졸업하였으며 영문을 전수하였고 민요의 창작과 연구에 힘을 들였다. 최근까지 무슨 저술에 착수 중이었다 한다.
이것은 동아일보 (34. 12. 28일자)에 보도된 그의 죽음을 알리는 관련기사이다. 소월은 1927년, 유일한 지기이던 나도향의 부고를 받고 충격이 컸으며, 또 2년 뒤, 고월 이장희의 자살소식을 들은 뒤 장취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5년 뒤 그도 다량의 아편을 먹고 그들의 뒤를 따랐으니, 요절한 우리나라 천재 시인들의 나이가 너무나도 아깝다.
나도향 24세, 이상 28세, 김유정 29세, 이들은 폐병으로 희생되었고 윤동주 28세, 음독자살한 고월과 소월은 각기 29세와 33세였다. 소월은 옛 스승 김안서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생은 기야요, 사는 귀야라고도 하였고. 사랑은 희망이요, 예술은 영원 이라 한 것도 역시 할 수 없어서 나중에 한 말이지요. 그것도 죄다 참말 쓸데없는 말이지요. 사람은 결국 없어지고 마는 것이니까요. 이 말에는 반대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1922년 21세이던 소월은 고향 정주 곽산에 돌아와 마치 시주머니의 끈을 푼 듯 진달래꽃 먼 후일 등 한 해 에 30여 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실패와 실생활의 파탄은 그를 타락지경으로 몰아넣었다. 6.25 때 어머니와 3형제를 북에 남겨두고 인민군으로 미군에 귀순, 월남에 성공한 소월의 셋째 아들 김정호씨는 미당 서정주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우리 아버지는 왜놈들 세상에 하나두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그게 한이 되어 그걸루 가셨습네다. 우리 어머니 보구두 같이 가 버리자고 제가 생겨나기 전에 조르신 일이 있대요. 어머님은 그래도 살아서 아이들을 길러내야 하지 않겠느냐 말리셨답니다. 그래서 혼자 가 버리신 게지요. 시인이니 그렇기도 했던 게라고 철나멘서 겨우 알게 되긴 했지만 자라면서 속으로 많이 원망도 했댔쉬다. 홍익회에 다니면서 관악구 봉천동 언덕빼기 단칸 셋방에서 살던 김정호씨의 술회였다.
소월의 어머니는 첫 아기를 친정에 가서 해산하였다. 소월의 부친은 부농답게 많은 물자와 음식을 나귀에 싣고 처가를 향해 가던 중 왜인에게 물건을 빼앗기고 구타까지 당하여 정신이상을 일으켰다. 실성한 아버지, 식민지배하의 암울한 세상, 그가 경영하던 동아지국의 탄압과 운영난, 사업 실패, 이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심정적 사인은 더 있으리라. 그는 두 딸에 이어 세 아들을 둔 아버지였고,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손이었다. 죽기 석 달 전, 곽산의 선영을 찾은 것은 10년 만이었다. 무덤에 성묘하고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그는 아내를 붙들고 앉아 술을 마셨다. 둘은 술에 취한 채 함께 곯아 떨어졌는데 이튿날 깨어보니 옆에 누워 있던 남편이 싸늘히 식어 있더라는 것이다.
나야 무식해서 아나요. 또 이야기도 안해 주고요. 마음이 상하고, 아프다면서 술만 마셨답니다. 술만 들면 울기만 했어요. 소월 아내의 증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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