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는 미국 제35대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재위 34개월 만에 죽었다. 달라스 시에서 오스왈드에 의한 암살이었다. 아이젠하워 스타일의 무감각 속에 위축되어 있던 미국 국민들은 젊고 미남인 청년이 내세운 뉴프런티어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다. 이 나라를 다시 한 번 활기와 움직임에 넘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61년 1월 21일. 마흔세 살의 젊은 대통령 케네디의 취임연설이 있었다. 건강에 빛나는 스포츠맨 이라는 케네디의 이미지는 그러나 속임수였던 것이다. 측근의 한 사람인 케니 오돈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케네디는 자동차 앞쪽에 항상 목발을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청중이 기다리는 장소로 갈때엔 절대로 그 목발을 사용하지 않는 거예요. 그는 단상에 우뚝 서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요, 그러나 연설이 끝나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두 손을 틀어 쥐고 눈을 감곤 했습니다. 그리고 곧 침실어 들어가서 자기 전, 한 시간 동안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고 고통을 달래곤 하였지요. 그의 어머니 로즈가 쓴 가족의 보건기록을 보면 그의 병력은 이러하다.
3살 전에는 백일해, 홍역, 수두, 성홍열, 청소년기에는 충수염, 임파절염, 재발성 황달, 만성천식 그러나 문제는 19살 때의 사고였다. 하버드 대학에서 그는 미식축구팀 선수였는데 시합 중에 넘어지면서 운 나쁘게 척추의 추간판이 하나 골절되고 말았다. 그것이 그를 평생 괴롭혔다. 게다가 1943년 해군으로 참전하여 태평양으로 나갔는데 솔로몬 군도 앞바다에서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게 된다. 이때 등의 장해가 더욱 심해져서 7개월 동안의 치료를 받고 귀국했는데 목발에 의지한 그의 혈액 속에는 말라리아 균이 헤엄치고 있었다. 재클린과 결혼하여서도 줄곧 고통에 시다리며 누워지냈고 두 차례의 수술 후 간신히 회복되긴 하였다. 그는 또 아디슨병 혹은 브론즈병이라고 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병에 걸려 있었다. 혈압을 조정하고 심장의 작용을 자극하며 혈관을 수축시키고 모든 영양소의 대사를 관장하며, 감염, 외상 등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내는 이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점심때 코티죤 환약을 복용야 했다. 낮에도 자동차를 세우고 어딘가의 호텔로 급히 들어가야 했다. 코르셋을 벗고 천천히 욕탕에 잠겨서 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전문가들은 만성이 된 아디슨병은 어김없이 정신장애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재직시에 대외적으론 미국 위신의 회복과 국내적으로는 뉴프런티어 정책을 내세워 신망이 높였으며, 62년의 쿠바 위기에서는 강한 태도속에서 유연성을 보여 이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관심과 중점은 외교문제와 노동문제였다. 그는 미국의 입법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해왔고 또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져온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재임기간 중 두 가지의 정책 과오를 지적 받았다. 그 중 하나는 핏그스만 안에 쿠바 망명자들을 상륙시켜버린 일과 두 번째로는 베트남 전쟁 때의 확대 가담이다. 그는 승전의 가망없음을 알고도 미군의 퇴각이라는 사태에 부딪치자 전쟁 확대의 결정을 내려 버린 일이다. 이때 그는 가엽게도 코티죤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인 워너 스톨 교수는 말한다. 아디슨병에 걸린 환자는 근육이 극도로 약해지고 많은 기능 부전이 발생하며 기억의 혼탁과 수면장애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디슨병은 환각적 정신분열증적인 두뇌장애를 일으킨다. 1963년 11월 22일. 그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접어들었다. 자동차에 탄 그의 옆자리에는 아내 재키가 정면에는 존B 코넬리 지사가 앉아 있었다. 케네디의 병을 벌써부터 알고 있던 코넬리는 그가 권력의 책무를 짊어지지엔 체력적으로 무리란 것을 예감하고 선거운동을 어떻게든 그만 두게 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케네디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군중들은 환호하면서 몰려들었다. 그때, 창고의 위층 창가에서 젊은 광신자 리하베이 오스왈드가 탄환을 이탈리아제 칼빈 소총에 장전했다. 아직 45세 밖에 안된 존F 케네디의 길은 거기까지였다.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 재클린의 절규 오! 노우 가 아직도 우리에겐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