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씨받이 여인의 한과 영광 - 공예태후
공예 태후 임씨는 고려의 제 16대 인종에게 사랑과 예절과 부재를 함께 바쳐온 현비였는데, 애초에는 왕자를 보기 위한 인종의 '씨받이 여인'으로 뽑혀들어온 궁인이었다. 임씨는 중서령 임원후의 딸로 문하시중 이위의 외손녀가 되니까 말하자면 문벌 좋은 집안의 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씨받이 여인으로 대궐 안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많은 설화적인 이야기를 뿌려 왔었다. 그녀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외조부 이위는 꿈을 꾸었다.
"내 꿈에 황색의 커다란 기가 원서방(사위) 집 중문에 세워졌는데, 그 깃발의 꼬리가 대궐안 선경전 추녀 밑에 닿아서 나부끼더란 말일세." "그래서요?" 이위의 사위 임원후는 목이 타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두고 보게. 이제 태어날 애가 여식이라면 다음에 틀림없이 대궐안 선경전에서 살 것이네." 그러한 기대, 실상 꿈으로 인한 기대였지만, 어떻든 그와 같은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안고 태어난 임씨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다. 그 때까지 대궐하고 아무 인연이 없게 되자 임씨의 부모는 혼처를 물색했다. 그녀는 평장사 김인규의 아들 김지효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혼례를 치른 그날 밤의 일이었다. 신랑이 신부의 방문 앞에 이르러 이제 막 방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참인데, 갑자기 신부의 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배야,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신부는 거의 사색이 되어 방바닥을 뒹굴었다. 신부의 입장도 입장이려니와 일이 이지경이 되자 난처한 쪽은 신랑이었다. 이직 신방에 들어 초야를 밝힌 사이도 아닌데 신부가 갑자기 죽게 되었다고 뛰어들어가 그녀를 간호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신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종종걸음만 치고 있는데 잠시 후 신부의 어머니가 방 안에서 역시 죽을 상이 되어 나왔다. "이 사람아, 신부가 저 지경으로 다 죽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그, 글쎄요....." "진정 미안하게 되었네. 신부가 저런 꼴이니 저꼴로 신방을 꾸밀 수도 없는 일, 신방은커녕 의원을 불러 무슨 병인지 진맥부터 보아야겠으니 오늘은 그냥 자네 집으로 돌아가고 뒷날을 보세." 신부 어미의 간곡한 말에 신랑을 할 수 없이 신부집을 물러 나왔다. 신부의 병은 그날 하루가 지나자 씻은 듯이 가셨다. 신부 집에서는 점치는 사람을 불러 하필이면 신방을 꾸미려던 그 시각에 신부가 병이 난 까닭을 점쳐 보았다. 점쟁이는 점을 보고 나서 누가 엿들을세라 조심스런 말로 점괘를 털어놓았다. "병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 집 따님의 귀함은 감히 저 같은 점쟁이가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주위에 있던 가족들은 무슨 말인가 하고 점쟁이의 입을 주시했다. "이 집 따님은 반드시....." 점쟁이는 잠시 말을 끊고 신부 임씨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반드시 국모가 될 것입니다." 하고 눈을 감았다. 가족들은 그 말에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놀랐다. 중서령 임원후의 딸이 장차 국모(왕비)가 된다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널리 퍼졌다. 자연히 김인규 아들과의 혼사는 깨어져버리고, 급기야 이 소문은 당대의 세도가 이자겸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뭐라고? 임원후의 딸이 장차 국모가 될 거라고?" 이자겸은 콧방귀를 뀌었다. 당시 이자겸은 이미 자기의 두 딸을 인종의 비와 차비로 들여보내 놓고 젊은 임금을 움직여 정사를 멋대로 흔들고 있었다. 이자겸이란 위인은 출세욕이 대단한 인물이라 진작부터 자기의 누이동생을 숙종의 비로 들여보낸 적이 있었고, 첫째 딸은 예종의 비로, 셋째와 넷째 딸은 인종의 비와 차비로, 이렇듯 내리 3대에 걸쳐 왕비를 들여보내어 제 한몸의 영달을 꾀해 오고 있었다. 인종은 자기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을 책봉하여 조선 국공으로 삼고 관부를 세워 따로이 관속을 두도록 하였으며, 백관들에게 그 사제에 나아가 하례하도록 지시했다. 이쯤되고 보면 이자겸의 권한은 임금인 임종의 그것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백관들이 행렬을 지어 이자겸의 집 뜰에서 하례를 할 만큼 세도 당당한 이자겸의 귀에 비록 점쟁이의 점괘이기는 하나 국모가 될 낭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배알이 뒤틀리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흥, 중서령 임원후의 딸이 장차 국모가 된다고? 그러면 지금 국모인 내 두 딸을 쫓아내고 왕비로 들어온다는 말이지?" 안될 소리였다. 이자겸은 벌떡 일어나 가마를 타고 대궐로 들어 갔다. "당장 임원후를 중서령의 자리가 좋으리까, 국공." "원후를 내어쫓아 게성 부사 쯤으로 삼으심이 좋을 듯 하나이다." "알았소. 당장 개성 부사로 나가 있도록 하리다." 이자겸의 미움을 사서 임원후는 중서령의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개성 부사로 밀려나고 말았다. 임원후가 개성 부사로 나가 있은 지 1년이 지나서였다. 하루는 아침 일찍 조복을 갖춰 입은 부수가 임원후에게 달려와 느닷없이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바로 어젯밤 일이옵니다, 사또마님." "이 사람, 아침부터 꿈 이야기는......" "아니옵니다. 하도 기이해서 꿈 이야기를 전해 드릴려구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습죠." "어디 들어보기나 하세." 부수가 꿈에서 보니, 사또가 있는 청사의 대들보가 뚝 부러져서 큰 구멍이 생기더니, 거기서 커다란 황룡이 기어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이는 반드시 사또마님 집에서 별다른 경사가 있을 징조입니다." 개성 부사 임원후는 황룡 어쩌고 하는 꿈 이야기가 내심 싫지는 않았다. 게다가 집안에 별다른 경사가 있을 것이라는 부수의 해몽은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기대를 갖게 하였다. 이 무렵 이자겸의 무리는 대궐 안팎에서 그 세도와 횡포가 더욱 심해 가고 있었다. 이자겸은 최근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승진한 척준경과 밀착되어 미구에 왕권을 손아귀에 넣을 심산이었다. 척준경은 본디 곡주 사람으로 글을 배우지 못한 무뢰한이었는데 예종 때 윤관 장군을 따라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뒤로 출세길이 트인 자였다. 이자겸은 이 척준경을 정 2품의 벼슬 자리까지 올려 주고 자기 심복으로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겸은 그의 아들 지원을 척준경의 사위가 되게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은 준경·준신 형제의 권세는 지못 이자겸의 그것에다 비길 수 있을 정도였다. 이자겸과 그 당여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자연 드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자겸이 그놈의 아들놈들 저택이 거리거리에 연하여 뻗쳐 있고, 날로 기세가 성하여 관작을 팔아 뇌물이 폭주하니 썩은 고기가 늘 수만 근이라." "그뿐인감? 즈이 집구석 노복을 풀어서는 남의 재물 약탈하기가 일쑤요." 또한 군국의 일을 주관하려고 왕을 자기 집에 행행하게 하여 책명을 줄 것을 청하며 시일을 강제로 결정, 왕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때마침 척준경의 아우 준신이 병부상서로 있었는데, 상장군 최탁 등이 준신을 미워하여 조만간 일은 터지고 말았다. 최탁은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 척순을 먼저 죽여서 그 시체를 궁성 밖에다 던져 버렸다. 낭중 왕의 는 성을 넘어 달려가서 이 사실을 이자겸에게 알렸다. 자겸은 그 아들 지미와 척준경 등 그의 당여들을 돌아보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일이 위급하게 되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각 성을 넘어 최탁의 무리를 섬멸합시다, 국공." 척준경이 서둘러 군사를 데리고 대궐 쪽으로 달렸다. 대궐 안에는 이미 상장군 최탁, 오탁,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대장군 권수, 고석 등이 군사를 독려하며 이자겸의 무리와 맞붙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척준경은 군사들을 데리고 주작문에 이르러 성을 넘어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자물쇠를 부수고 신봉문에 이르자 고함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 최탁의 군사들은 척준경의 군사가 수적으로 많음을 직감하고 낙담이 되어 감히 나와서 싸우려는 자가 없었다. 그날 밤, 척준경은 야음을 틈탄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동화문 행랑에 섶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바람이 불길을 부채질하여 삽시간에 궁인들이 거처하는 전각으로 번졌다. 놀란 궁인들은 잠자리에 든 모습 그대로 몸을 일으켜 사방으로 숨어 버렸다. 왕은 불길을 피해 가까스로 말을 타고 연덕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척준경의 무리들은 마침 왕을 호위하고 있던 오탁을 잡아 목 베어 버리고 반대파에 대한 소탕 작전에 나섰다. 대세는 그 사이에 이자겸·척준경의 무리 쪽으로 기울어갔다. 척준경은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원탁, 권수, 안보린 및 대장군 한경, 윤성 등 10여 명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그날 밤의 화재로 궁궐은 불에 타 없어지고, 이자겸은 왕을 자기의 사제인 중흥택으로 옮겼다. 이 사건이 수습된 직후 척준경은 문하시랑 판병부사란 직함을 받았고, 자겸은 왕을 모시고 있던 내시 25명을 모두 내보내었다. 결국 왕의 목숨은 이자겸의 손안에 들어가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젊은 왕 인종은 쉬이 절망할 사람이 아니었다. 왕은 이자겸에게 붙어 있는 내의 최사전을 포섭하여 그와 비밀리에 이자겸 제거 계획을 세웠다. "자겸이 발호하는 까닭은 준경을 믿기 때문이옵니다, 전하." 최사전은 척준경의 위치를 설명하고 나서, "만약 전하께서 준경을 얻을 수만 있다면 병권이 준경에게 속해 있으니 자겸은 자연히 저 혼자 남게 될 것이옵니다."하고 척준경 포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경이 국공(이자겸)의 심복이 되어 혼인까지 맺었고, 그 아우와 아들이 모두 관병에게 살해당했으니 이 일로써 국공을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왕은 최사전을 척준경의 집으로 보내어 충의로써 왕실에 힘쓰기를 타일렀다. 겸하여 왕은 준경에게 비밀리에 조서를 내려 마음을 다해 짐의 곁에서 돕기를 힘쓰라 당부했다. 일이 공교롭게 되어 가느라고 때마침 이자겸의 아들 지언의 종이 척준경의 종과 서로 싸우게 되었다. 지언의 종은 척준경의 죄를 일일이 들어 죽을 죄에 해당한다고 떠들어대었다. 척준경이 그말을 듣고 마침내 이자겸과 틈이 생겨 버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최사전이 척준경을 달래어 결국 왕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다짐을 받았다. 척준경이 자기 쪽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를 채었는지 이자겸은 왕의 목숨을 빼앗고 왕위를 찬탈하는 일을 급히 서둘렀다. 왕을 죽이는 하수인은 차비로 들여앉힌 자겸의 넷째 딸 이씨였다. 자겸은 차비 이씨에게 독약이 든 떡을 왕한테 올리라고 권했다. 그러나 차비 이씨는 이 사실을 왕한테 알리고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자 까마귀가 그걸 먹고 죽어 버렸다. 자겸이 두 번째로 독약이 든 국을 보내어 왕에게 올리라 했지만 차비 이씨는 이번에도 식기를 들고 거짓 미끄러져서 그 국을 모두 쏟아 버렸다. 이 소식을 왕으로부터 전해 들은 척준경은 일을 서둘러 이자겸의 무리를 급습, 일망 타진하고 말았다. 왕을 위기에서 구해준 차비 이씨나 정비 이씨는 역적의 딸이자 두 사람 다 임금에게 이모가 되니, 임금의 배필이 될 수 없다는 간관의 말에 따라 모두 폐하여 대궐에서 내어쫓았다. 하루아침에 두 비를 잃은 인종은 밤마다 널찍한 침소에서 혼자 잠을 설쳤다. 어느 날 밤 왕은 대궐에서 나간 두 비를 생각하다 잠이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 서둘러 척준경을 입궐하라 일렀다. 왕을 도와 이자겸을 처치한 척준경은 공신의 칭호를 하사받고 겸하여 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의 별슬에 올라 있었다. "신 준경 등대이옵니다." "오, 어서 오오. 짐이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임자 닷 되와 황규(해바라기) 석 되를 얻었으니 길몽인지 흉몽인지 풀이 좀 해보구려." 척준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임자 닷 되, 황규 석 되를 음미해 보았다. 이윽고 눈을 뜬 준경은 꿈이 길조라 먼저 제 입부터 벌어지는 것이었다. "전하, 임자는 임이니 임씨 성을 비로 맞아 들일 징조요." "옳거니....." "그 수가 또 다섯임은 다섯 아들을 낳을 상서요." "저런. 그리고는?" "그리고 황규의 황은 곧 황이니, 황왕의 황과 같고, 규는 규니 도규의 규와 같음이오니, 이른바 황규라 함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이고......." "옳거니. 그럼 황규 석 되의 그 되란 무엇을 이름이오?" "그야 물론 다섯 아들 중의 세 아들이 나라를 맡아 다스릴 징조이옵니다." 이에서 더 좋은 꿈풀이가 어디 있으랴! 왕은 당장 다섯 왕자를 슬하에 두고 싶었다. 인종은 꿈에 나타난 대로 곧 임씨 성은 가진 낭자를 물색하라 일렀다. 그러자 얼마 후 개성 부사 임원후의 딸이 덕문에서 나서 예절 바르고 부재를 겸비한 낭자라 하여 왕은 그녀를 왕자 다섯을 얻기 위한 씨받이 여인으로 입궁하게 된 처지가 부끄럽고 한스러웠으나 참기로 했다. 인종 4년에 입궁하여 호를 연덕궁주라 칭하게 된 임씨는 인종의 사랑을 받은 지 꼭 1년 만에 왕자 탄생이 길몽에 화합하는 일이기도 하려니와 오랜만에 왕자를 얻게 되자 그 기쁨은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임씨의 처소로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기쁨을 전하고 하사품을 내렸다. 은기, 채단, 포곡, 안마....... 애정 어린 왕의 예물이 임씨의 처소를 가득히 메웠다. 임씨는 그 뒤로 계속 왕의 사랑을 받이 인종 7년에는 정식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둘째 아들 경을 낳았다. 이어서 셋째아들 호, 넷째아들 충희, 다섯째 아들 탁을 낳았으며, 게다가 승경, 덕녕, 창악, 영화, 네 궁주(공조)를 낳으니 인종의 꿈대로 씨받이 여인의 사명을 다한 셈이었다. 왕비 임씨의 생애는 그러나 씨받이 여인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뒷날 의종, 명종, 신종이 뒨 세 왕의 모후로서 왕비 임씨는 그 자식을 보전하는 데 힘썼고, 부도로서 그 부군(인종)을 섬겼으며, 반드시 예절을 따르고 검약으로 가히 그 몸을 지켰으니 75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버린 그녀의 생애는 인종의 찬사처럼 실로 고려의 경사를 더한 왕비였다. 왕비 임씨는 국모가 되어 선경전에서 놀 것이란 꿈 해몽 그대로 평생을 대궐 안에서 살다 세상을 떠나니 씨받이로 입궁했을 때의 조그마한 부끄러움이 있었다면 그 부끄러움은 뒷날 그녀에게 차지된 공예 태후의 예우로 말끔히 가셔진 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