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노자에서 발원한 생각이 시대의 전면에 부상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경우가 또 한 번 있었다.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뚜렷하게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동아시아의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오히려 도교의 경우를 능가한다. 그것은 중국의 위진시대에 유행했던 현학이라는 일련의 사상적 경향이다.위진의 현학은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이후 동아시아의 문명사의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동아시아 문명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인 중국 문명과 불교의 만남을 가능케 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10세기 이후 천년 가까이 동아시아 문명의 색깔을 결정지었던 성리학에 부정할 수 없는 그림자를 짙게 남겼다는 점이다. 아울러 위진의 현학은 장자에서 싹트기 시작한 예술정신의 혼을 충분히 발아시킴으로써 이후 동아시아의 예술 세계를 한층 기름지게 하였다. 한나라의 경학이나 송나라의 성리학이 그렇듯이 현학이라는 이름도 중국 위진시대에 전개된 학문의 경향을 포괄하여 부르는 용어이다. 그런데 경학이나 성리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학이라는 명칭도 아무 의미 없이 붙여진 것은 아니다.그 이름에는 위진시대의 학술적 분위기가 농축되어 담겨 있다. 현이라는 글자는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르 황 하면서 무슨 주문처럼 우리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천자문의 바로 그 세 번째 글짜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검다는 말은 말 그대로 색깔이 검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깊게 파인 우물 속처럼 너무 깊어서 분간이 안간다는 뜻이다. 위진 현학은 바로 이 현이라는 글자의 의미가 보여 주는 그대로 심오함 즉 기본적으로 강한 형이상학적 성향을 띤 사상이었다.
위진의 현학이 고도의 형이상학적인 특징을 지니게 된 데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다.한나라 말에 이르러 제국의 정치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하자 제국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담당했던 유학 역시 여러 군데서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유학의 경전에 의거했던 이른바 경학적 세계관이 한제국의 정치 사회적 질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학적 세계관의 핵심은 도덕적인 의지를 갖춘 하늘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다. 경학에서 볼 때 자연과 인간 세계로서 이 세상이 보이는 움직임의 중심에는 하늘의 뜻 이라는 도덕적인 목적이 있고 이러한 도덕적인 뜻을 실현하는 인간세상의 장치가 바로 한나라의 정치 사회 체제였다. 이런 배경에서 한대에는 인간세상의 무질서 특히 정치적으로 혼란이 오면 의지를 갖춘 존재인 하늘이 천재지변과 같은 경고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인간사회를 감독해 간다는 이른바 천인감응론이 극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한에 들어서면서 한제국의 질서가 근본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자 이러한 세계관도 자연히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즉 경학이 더 이상 공동체를 지탱하는 유효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위진시대가 한대로부터 물려받은 첫번째 과제였다.위진의 지식인들은 자신딀의 공동체를 지탱하던 이데올로기가 허물어져 내리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이를 해결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해야 했다.그들은 먼저 인간이 경학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연에 덕지덕지 입혀 놓은 도덕 드으이 인간적인 껍데기들은 벗겨 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파악하고자 하였다.한제국의 도덕규범이나 경치체제를 합리화하는 기준이 되었던 도덕적인 의지를 갖춘 하늘이라는 관념 그리고 인간은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경학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걷어 내고자 하였다.대신 현학가들은 인간사회의 정당성의 근거를 도덕적인 의지로 채색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질서로부터 끌어내는 방법을 택했다.바로 이 과정에서 현학가들에게 힌트를 준 것인가 하는 문제에 깊이 빠져들었던 위진의 현학 사상가들 중에서도 왕필은 가장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다.그는 스물네 해라는 짧은 시간을 살았지만 노자와 주역에 대한 독보적인 주석서를 남긴 천재였다.왕필은 중국철학사에서 통상 유,무의 논쟁으로 불리는 위진시대에 벌어진 일련의 논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주장을 펼쳐 보인다. 당시의 이 논쟁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새로운 틀로 연결시키고자 한 현학가들의 관심이 노자의 생가고가 결합하며 탄생했다.
여기에서 '유'란 말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고 표현하며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와 현상들을 일컫는다. 물론 이 범주 속에는 당연히 인간사회도 모함된다. 그런데 이러한 '유'가 유로서 작용하기 위해 서는 '무' 가 전제되어야 한다. 가령 그릇의 비유를 들어 생각해 보자. 그릇이 그릇노릇을 하려면 텅 빔이 있어야 한다.만약 그릇에 빈 부분이 없다면 어떤 음식이나 물도 담을 수 없게 되고 그릇은 그릇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우리가 보통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기나 플라스틱 부분을 그릇이라 하지만 정작 그릇이 제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텅 비어 있는 부분 때문인 것이다. 노자는 모든 현상에 포함되어 있는 두 측면 즉 유와 무이 통일로서 도를 생각했고 또 그것을 통해 만물을 바라봤다.그런데 왕필은 인간사회의 질서를 포함하는 세계의 다양성 즉 유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리로서 무를 새롭게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그는 무를 유와 상대되는 차원에서 한 단계 끌어올려 도와 똑같이 놓고 보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인간사회를 포함하는 일체의 유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의미하는 무로부터 생성되어 나온다. 따라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단순명료해진다. 인간사회의 모든 제도와 규범은 인간의 자의적인 창작품이 아니라 자연 질서로부터 필연적으로 비롯되었고 자연으로부터 정당성을 보증받을 수 있는 산물이라는 논리이다.
물론 장자의 주석서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주석서를 남긴 곽상의 경우처럼 현학 가운데는 인간사회의 질서는 자연 질서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 나리아 자연질서 자체가 곧 인간사회의 질서라고 하여 이 양자의 동질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또 다른 입장도 있기는 했다.하지만 이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같은 것으로 그것은 목적론적인 세계관에 기대지 않고 인간 사회의 질서를 정당화시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서 현학가들은 삼국지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조의 위나라와 사마의 진나라 지배층의 관심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갔다.
그러나 무에 대한 위진 현학의 새로운 접근은 결과적으로 당시의 현실보다 동아시아의 문명사 전체에 더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그것은 불교가 중국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불교아 중국 문명의 만남은 서양사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조우 비견될 만큼 대단한 의미와 파장을 지닌 사건이다.그런데 서로 다른 두 문명의 만남은 곧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의 만남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이러한 만남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양자의 세계관을 연결시킬 적절한 매개고리의 존재 여부이다. 이것이 없다면 문명의 만남은 필경 오해와 갈등을 빚거나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하지만 불교가 중국에 전파될 때에는 훌륭한 매개고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위진의 현학이었다. 특히 현학이 본격적인 철학 개념으로 승화시킨 무라는 개념은 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을 동아시아인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다리 역할을 하였다.공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0 이라는 숫자를 생각해 낸 인도인들의특유한 사고방식과 연결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그런데 아라비아 숫자가 전파되기 전까지 동아시아인들에게는 0 이라는 수의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공이란 개념도 그만큼 낯설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동진시대 승조라는 중국철학사의 또 다른 천재가 무라는 개념을 통해 공이란 의미를 중국인들에게 이해신킬 수 있었던 것이다. 노자에서 발원하여 현학에서 새롭게 해석된 무라는 안내자가 없었다면 그 뒤에 차례로 봉오리를 틔우는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찬란한 꽃들 즉 천태나 화엄이나 선과 같은 연꽃들의 만개는 불가능했거나 훨씬 지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장 사상에 근원을 둔 위진 현학의 파도는 단순히 불교의 영역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에 무시 못할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성리학의 탄생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학문이다.그것은 타락한 자기 시대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것이 인륜의 질서를 도외시하는 불교라는 외래사조가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 진단했던 주오하주의자들이 태동시킨 학문이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오하는 대상을 닮아 가는 것은 일상의 삶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서도 일어난다. 성리학 역시 그 출발에서부터 불교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역설적으로 성리학의 곳곳에는 부정할 수 없는 불교의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역설적으로 성리학의 곳곳에는 부정학 수 없는 불교의 숨결이 깊숙이 배어 있다.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성리학의 수양론에 배어 있는 선불교적인 요소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요컨대 성리학은 일종의 불교화된 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성리학에 영향을 미친 불교가 인도불교 자체가 아니라 위진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노자와 장자의 영향을 받은 중국화된 불교라는 점에서 성리학 역시 노자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물론 성리학에 미친 현학의 영향이 이처럼 불교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성리학의 기본 논리인 이기론에도 바로 현학적 요소가 담겨 있다.잘 알려진 대로 성리학은 수많은 현상들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요소를 기라 하고 이러한 현상 세계의 근본이 되는 이치를 리라 한 뒤 기를 리의 지배 아래에 두고자 한다. 즉 인간들이 본받고 삶의 표준으로 삼아야 할 우주의 근본 원리로서 리를 우위에 두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이론은 현학의 무와 유의 관계를 그대로 응용한 혐의가 짙다.성리학은 유를 생성시키는 근원적인 원리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속서옫 개념도 없는 현학의 무에다가 모종의 윤리적 개념을 부여하여 새로운 리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다.성리학자들은 이런 방식을 통하여 이 세상은 리라는 도덕정 원리가 지배한다는 유학 특유의 세계관을 세롭게 부흥시킬 수 있었다.이렇게 본다면 노자는 두 개의 필터 즉 중국불교와 위진 현학이라는 두 개의 필터를 통하여 성리학에 깊숙이 스며들어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위진현학이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모색하는 방향으로만 흐른 것은 아니다.거기에는 자연 질서로부터 인간사회의 정당성을 끄집어내려는 일체의 시도를 강하게 거부하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으니 흔히 죽림칠현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익숙한 일군의 현학가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살아 숨쉬는 인간을 이른바 삼강오륜식의 규범에 가두어 질식시켰던 한대 경학의폐해를 통감했다. 때문에 그들은 또 다른 형태로 인륜질서의 정당화를 시도하는 다른 현학가들의 작업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그들은 인간사회를 자연 질서와 연결시켜 정당화시키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제도화된 자연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호흡하고자 했다. 지금의 사람들에게도 일부 전해지는 죽림칠현의 파격적인 행동들은 일체의 제도적 삶을 거부하는 그들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결과이다.죽림칠현 가운데 한 사람인 유령은 시동더러 술병과 삽을 들고 다니게 하고서는 자신이 술을 마시다가 쓰러지면 그 자리에 묻으라고 했다 한다. 그는 또한 집에서 벌거벗고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런 그를 나무라는 사람이 있으면 천지는 나의 집이고 집은 나의 속옷인데 어떤 놈들이 내 바지 속에 들어와 떠드느냐고 호통치기조 했다 한다.이들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그들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롸 같이 어떠한 제도적인 틀로부터도 자유롭고자 했던 탈속적인 삶 속에서 중요한 도가적 정신 하나가 되살아나니 그것이 바로 장자의 심미적 정신세계이다. 중국의 예술은 위진시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탁 트인 풍경의경지를 열어 갈 수 있었다.위진남북조의 글씨가 그렇고 당대의 시가 그러하며 송대의 산수화가 그러하다.노자에서 발원하여 자유분방했던 선진시대에 웅대한 경관을 펼쳐 보인 장자라는 호수가 위진을 거치며 새롭게 용솟음쳤던 것이다.바야흐로 잠들어 있던 장대한 예술적 영감의 세계에 생동하는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것이 위진 현학이 그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이다.일반적으로 현학에서 활발히 연구된 노자의 주역 장자를 일러 삼현서라고 하지만 현학의 정신을 발아시킨 진정한 토양은 결국 노자 하나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이 셋의 중심에 노자가 서있기 때문이다. 장자에 대해서는 새삼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을 터이고 주역의 경우도 통상 유학의 기본 경전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노자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헌이다.아니 거기에 담겨 있는 규범적인 내용을 걸러내고 순수한 사유의 틀만을 놓고 말한다면 주역은 육가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가적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주역을 유가 계열의 저작이 아니라 도가 계열의 저작으로 보는 주장이 새롭게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왕필 역시 노자를 먼저 주석하고 거기서 축적된 이해를 통하여 주역을 주석했다.이것만 보더라도 삼현서 가운데 노자가 차지하는 지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 이후의 동아시아 문명사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위진 현학에서 도덕경은 그 저류를 관통하는 알파요 오메가였던 셈이다.
주류와 질서와 문명이 가지 않은 길 우리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문명의 젖줄이 되어 온 철학적 유산 가운데 하나인 노자와 도덕경에 대해 살펴 봤다.도덕경은 오늘날의 객처럼 체계적인 형태로 글이 전개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시적인 응축을 통해 곳곳에 천재적인 상상력과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혜안이 번득이며 거기에 담겨 있는 생각 하나하나는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고뇌 어린 결정이다.거기에는 춘추전국이라는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살므이 참된 모습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를 가로막는 인간의 모든 거짓과 위선 그리고 교만에 분노했던 한 철인의 순결한 외침이 담겨 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일구어 오면서 역사 속에서는 많은 가치들이 부침을 거듭했다.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도 하나의 분명한 궤적이 있었음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강함에 대한 남성성에 대한 그리고 문명에 대한 인간의 환호이다. 사람들이 부드러움을 연약한 것이라 하여 배척하고 강함만을 숭배해 온 결과 강한 것이 옳은 것이 되었고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는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발맞추어 여성적인 이미지는 남성적인 이미지 밑으로 굴복해 들어가야 했다.문명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연에 대한 수탈과 학대의 과정이었다. 자연적인 것은 철저히 인간의 구미와 생각에 맞게 뜯어고쳐져야 했고 그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나 공급하며 군말 없이 엎드려 있어야 했다.게다가 자연은 인간이 욕망을 충족하고 나서 뱉어 낸 삶의 찌꺼기마저 고스란히 떠맡아야만 했다.
도덕경 속에는 이처럼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줄곧 수세로 내몰리기만 한 우리 삶의 다른 부분들 즉 문명에 대한 자연,강함에 대한 부드러움 남성적 이미지에 대한 여성적 이미지를 복권하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그러므로 그것은 문명을 사는 우리가 지나온 길에 대한 가지 않은 길의 반란이다. 지나 온 길부터 방향이 틀어졌는지는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이런 성찰은 언제나 관습이 울타리와 무반성의 일상에 길들여진 삶에 대한 총체적인 반란의 충동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 관습의 울타리와 무반성적인 일상은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만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수입되어 지금도 우리의 발목을 부여잡고 있기도 하다.세계는 하나의 진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신앙들 역사는 하나의 궁극적인 의미가 자신을 구현해 가는 도정이라는 확신들 그리고 궁극적인 의미가 자신을 구현해 가는 도정이라는 확신들 그리고 얼음처럼 투명한 이성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삶과 세계를 완벽하게 재단할 수 있다는 오만들 이런 생각들은 더 이상 유라시아 대륙 너머의 것만은 아니다.그것은 이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의 신념들이다.그러므로 이런 서구적 전통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작업들이 노자의 생각과 만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만남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노자와 오늘 우리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서구의 왜곡된 형이상학적 상유에 저항하는 그런 몸짓들의 만남 역시 항상 긍정적ㅇ니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과정 때로는 존재 또 때로는 해체라는 고리를 통하여 얼마간의 오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만남을 가로지르는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억압하는 이 시대의 삶의 형식에 대한 정항이다. 노자의 생각은 그런 만남들 속에서 오늘도 새롭게 부활하고 있으며 그 부활은 인간의 삶을 구속하는 제도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한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완전한 해방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적 꿈을 접고자 하지 않는한 도덕경은 여전히 그 꿈을 향한 여정의 의미 있는 동반자이다. 도덕경이 오늘날까지도 새롭게 주석되고 끝없이 번역되는 것은 아마도 살므이 참된 본질을 꿰뜷는 꺼지지 않는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주석이라는 방식을 통한 도덕경의 재해석 작업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되풀이 되어 왔다 엄령봉이라는 사람은 중국철학의 텍스트에 대한 현대의 가장 권위 있는 수집가 가운데 하나인데 그가 편찬한 도서목록에 실려 있는 도덕경에 대한 역대 주석서만 하더라도 336종에 이른다. 여기다가 도교 경전의 총집인 도장에 산재해 있는 단편들이나 옛 문헌 목록들 속에 흔적만 남기고 있는 것들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천여 종을 가볍게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도덕경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은 서양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도덕경은 서양에 전해진 뒤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이후 최초의 영역본이 출간된 1868년부터 1967년까지 평균 두 해에 1종 꼴인 48종의 번역본이 나왔으며 특히 1943년 이후로부터는 16개월당 한 권 꼴로 번역되었다는 조사도 있다. 서양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영역된 책이 바로 도덕경이라는 주자옫 그냥 들어 넘길 말은 아닌 것이다.도덕경은 서구의 문자체계에서 보면익숙하지도 않은 표의문자로 쓰여진 그러면서도 논리정연한 철하서라기보다는 난해한 한 권의 철학적 시모음에 가깝다.이런 도덕경에 대해 이방인들이 그토록 관심을 보이는 것은 동서양을 통틀어 인간 모두에게 갖는 도덕경의 호소력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와 관련된 우리의 전통은 너무나 빈곤하다.최치원이 쓴 난랑비 서문이라는 글에서 주나라 황실 도서관의 책임자라는 자의 직함이 분명히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노자의 사상은 상당히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걸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에 비해 노자자 도덕경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매우 빈약했다. 굳이 찾는다면 도덕경의 정수와는 거리가 먼 민간신앙의 도교적인 전통 속에서 노자의 그림자를 언뜻언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도덕경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래야 조선조에 나온 네댓 권에 지나지 않고 그마저도 대부분 유학적 편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관직에 나가서는 유학적 삶을 살고 물러나서는 도가적인 삶을 지향했던 지식인 사회의 오랜 전통이나 이 땅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했던 풍류적 예술혼을 기억한다면 이는 이례적이다.비록 조선이 유학의 나라로 도가를 이단시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고 그 긴 시간 동안 도덕경에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그 정도로 우리는 유학이라는 제한적인 틀 속에서만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경직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이런 점에서 단순한 배낌이 아니라 도덕경의 메시지를 주체적으로 해독하는 작업은 여전히 우리에게 미완의 과제로 남겨져 있는 셈이다.
현대의 저명한 중국철학사가인 풍우란은 노자 이후 2천년간의 노자 주석본을 다 합친다 해도 노자 한 권의 의미를 포괄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이것은 사실이다. 위기의 시대에 문제를 풀어 나갈 수 있는 영감의 원천 역할을 하는 것이 바이블의 힘이다.노자 즉 도덕경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가 부닥친 문제에 대한 정답을 미리 준비해 좋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노자는 결코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부연하지 않는다. 노자 그리고 그 후 수천년의 역사가 만들어 낸 바이블의 세계 그 세계에 뛰어들어 도덕경과 적극적으로 대화화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