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7. 군인은 군인의 임무에 따른 뿐이다(위청, 곽거병)
2) 불패의 젊은 영웅(곽거병)
곽거병은 위청의 여동생인 소아의 아들로서, 그녀가 무제의 귀여움을 받아 후궁이 되자 일찍부터 궁궐에서 살았다. 그리고 무제 7년의 정벌 때에는 18세로 종군하여 유격대를 지휘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로로 관군후로 임명되고 또 3년 후에는 표기 장군에 임명되었다. 고난 속에서 자람 숙부 위청에 비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귀족 장군으로서 유달리 눈을 끄는 화려한 존재였다. 곽거병의 부대는 언제나 정선된 정예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참 부장의 부대의 병졸, 군마, 병기 등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그리고 곽거병은 그 강력한 기병과 함께 언제나 본대보다 앞장서서 대담하게 적진 깊숙이 진공해 들어갔다. 게다가 그의 부대는 행운도 따라 한번도 곤경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장군들은 언제나 불운에 휘말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문에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신임이 나날이 두터워지더니, 드디어 대장군 위청도 능가할 기세가 되었다.
흉노의 혼야왕도 서부 지역에서 번번이 한군에게 패하여 수만의 병졸을 잃었는데, 모두 곽거병의 군대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흉노의 선우는 격노하여 그 해 가을, 혼야왕을 처벌하기 위해 출두를 명했다. 이에 대해 혼야왕은 휴도왕 등과 공모하여 한나라에 항복할 결심을 하고 사자를 보내어 우선 변경의 수비를 맡고 있던 한군에게 그 뜻을 전했다. 때마침 한나라의 이식 장군이 황하 유역에 성채를 쌓고 있었다. 장군은 혼야왕의 사자를 맞이하자 즉각 무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무제로서는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항복을 가장하고 들어와 변경을 습격할 우려는 충분했다. 그리하여 무제는 곽거병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라고 했다. 곽거병의 군사는 황하를 건너 흔야황의 부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혼야왕의 장들이 등을 보이며 도망갈 기색을 보았다. 그것을 보자 곽거병은 혼야왕 진영에 뛰어들어 도망가려는 자 8천여 명을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이어 혼야왕만을 말에 태워서 무제에게 먼저 보내고, 자기는 항복한 군을 통솔하고 황하를 건너 귀로에 올랐다. 이때에 항복한 흉노는 수만을 헤아렸다.
장안에 도착한 곽거병에게 무제는 거액의 상금을 하사하고, 혼야왕에게는 1만 호의 봉지를 주어 탑음후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무제는 곽거병의 공을 칭송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표기 장군 곽거병은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서역왕 혼야왕과 그 부하를 모조리 우리 한나라에 귀순시켰다. 군량은 적의 양식을 빼앗아 충당하고 병졸을 강궁 1만여 명을 편입했다. 포악하고 강한 자는 죽여서 수급과 포로를 합쳐 8천여를 얻었고 더구나 우리 장병에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 우리 장병은 거듭되는 토벌전을 잘도 견디어 주었다. 이리하여 황하 연안으로부터 요새밖에 이르는 땅에서 백성의 고초는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려 하고 있다. 이로써 표기 장군 곽거병에게 1천 7백 호를 하사함과 동시에 주둔군을 반감하고, 백성들의 노역을 경감하노라."
그로부터 얼마 후 한나라는 귀순해 온 흉노를 변경의 옛 요새 바깥 땅에 분산 이주시켰다.그들은 모두 오르도스의 땅에 있으면서 옛날 풍습을 유지한 채 한나라에 귀속해 살았다.
치열한 사막전
기원전 119년 봄, 무제는 대장군 위청, 표기장군 곽거병 2명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의 흉노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기병은 각각 5만, 여기에 보병, 수십만이 후속부대로 뒤따르고 있었다. 이때에도 정선된 정예 부대는 모두 곽거병 군에 배속되어 있었다. 원래 곽거병은 정양을 근거지로 삼고 선우와 대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 출정하려 할 때 포로를 잡아 문초하여 선우가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무제는 급히 작전을 변경하여 곽거병에게는 더욱 동쪽에서 출격하라고 명령했다. 대신 정양에는 위청의 군대를 보냈다. 이리하여 위청은 곽거병과 협력하여 흉노에 공격을 가하려고 사막 깊숙이 진격을 개시했다. 그 병력은 5만 명이었다. 이때 전에 흉노에 투항했던 조신이 선우에게 말했다.
"사막을 건너온다면 한나라 군사는 지쳐 있기 마련이니 작전을 잘 쓰면 무난히 적을 생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우는 정예군을 골라서 사막의 북쪽 기슭에 포진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도 한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위청 휘하의 군대는 국경에서 천여 리 진격한 지점에서 선우를 발견하여 즉각 진형을 정비했다. 위청은 무강거(판자로 에워싸고 포장을 씌운 차량)를 고리 모양으로 늘어놓아 본영으로 하고 5천 기를 적진으로 돌격시켰다. 흉노군도 약 1만 기를 내보내 이에 맞섰다. 마침 해가 저물 무렵이었는데 질풍이 모래를 휘말아 올리며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양군이 모두 거의 상대방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군은 좌우 양 날개의 병력을 투입해서 차츰 포위의 태세를 갖추어 갔다. 선우는 한군이 병력으로도 우세할 뿐 아니라, 투지도 왕성하여 이대로는 자기네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황혼 속을 노새 6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부하 수백 기와 함께 단숨에 한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도주했다. 양군이 뒤섞인 혼란된 격전은 날이 저물어도 계속되어 양군이 거의 같은 숫자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다가 사로잡은 포로의 입에서 선우가 이미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지체 없이 가볍게 무장한 기병이 어둠을 뚫고 선우를 추적했다. 대장군 위청도 직속 부대를 이끌고 추적했다. 그리하여 흉노는 대열이 흩어지며 도주하였고 새벽녘까지 2백 리 쯤 진격했으나 선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위청은 여세를 몰아 계속 흉노를 몰아붙이면서 전군에게 넉넉하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곳에서 하루를 머문 후 철수했는데 이때 성을 다시 쓰지 못하도록 완전히 불태우고 나머지 군량은 모두 가져왔다. 한편 대장군 위청이 선우와 대전하고 있을 때, 전장군인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가 이끄는 부대는 본대와 떨어져 동쪽으로 진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고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었다. 두 장군이 본대에 합류한 것은 본대가 사막의 남쪽까지 철수해 왔을 때였다. 위청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부관을 보내어 해명을 요구했다. 이때 이광은 보고서 작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결했으며, 조이기는 속죄금을 내고 평민으로 되었다. 이 전쟁에서 위청 휘하의 군대가 귀환하기까지 올린 전과는 포로, 수급을 합해 1만 9천에 이르렀다. 한편 흉노측에서는 선우가 열흘씩이나 행방불명이었기 때문에, 우욕여왕이 자립하여 선우를 자칭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래의 선우가 나타나자 우욕여왕은 깨끗이 본래의 지위로 돌아갔다.
패배란 없다
표기장군 곽거병의 군대는 위청군과 같은 규모였다. 다른 점은 휘하에 부사령급 막료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천리도 넘게 진격하는 전과를 올려 그 성과가 대장군 위청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개선한 후 무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을 통솔함에 있어 포로의 정예를 더하여 얼마 안 되는 장비를 가지고 대사막을 넘었다. 그리하여 획장거(강 이름)를 건너 흉노의 왕 비차기를 참살하고 좌대장의 군과 싸워서 그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둔두왕, 한왕 등 3인과 장군, 대신을 비롯하여 83명을 사로잡았다. 아울러 낭거서산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고연산에서는 땅에 제사지냈으며, 한해(고비사막이라고도 하고, 바이칼호라고도 함)를 굽어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포로의 총수는 7만 4백 43명, 적군의 3할을 격멸시켰다. 더구나 군량은 적에게 뺏어 오지 깊숙이 침공하면서도 보급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이로써 표기 장군에게 5천 8백 호를 하사한다."
빛과 그림자
표기장군 곽거병의 부하들은 부장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상금을 받거나 승진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이에 반하여 대장군 위청에게는 아무런 상금도 없고 부하에게도 영광을 얻은 자가 없었다. 이때부터 위청의 권위는 나날이 쇠퇴하고, 곽거병의 명망은 높아만 갔다. 위청은 친구나 식객들까지 썰물처럼 사라져 곽거병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의 추천만 있으면 쉽사리 관직, 작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임안만은 그것을 옳게 생각지 않고 위청 밑에 머물러 있었다. 곽거병은 과묵하고 기골에 넘친 인물이었다. 무제가 그에게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배우라고 권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 순간순간에 어떻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가 문제일 뿐입니다."
또한 그에게 커다란 저택을 하사하며 무제가 한번 가서 보고 오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흉노가 망할 때까지는 저렇게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겠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무제는 더욱 더 그를 존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곽거병은 젊었을 때부터 무제의 측근에서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부하를 위로할 줄을 몰랐다. 그가 출진할 때에는 무제가 친히 수레 10대 분의 좋은 음식을 내렸다. 그 식량은 개선할 때까지 남아돌아서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사졸들은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또한 요새 바깥 땅에서 병사들이 굶주림 때문에 걸을 기력조차 잃고 있을 때에도 그는 장수들과 함께 공차기를 즐겼다. 곽거병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이 출중한 장군은 불과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한편 위청은 인품이 인정스럽고 겸허하여 부하들의 인심을 사로잡는 정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망은 곽거병을 따르지 못했다. 언젠가 위청에게 그의 부하 소건이 물었다.
"왜 장군께서는 천하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그 이름을 빛내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위청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전에 몇몇 대신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 인물들을 초빙하자, 황제께서는 이들을 매우 미워해 그들을 결국 극형에 처하셨다. 사대부를 가까이 하거나 어진 사람을 불러들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을 물리치는 것은 처자께서 하실 일이다. 신하된 사람은 오직 법을 따르고 직책을 지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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