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2. 북방의 정복자(흉노전)
한나라를 마음껏 농락하다
이전부터 한왕 신은 흉노의 장군이 되어 자리가 잡히자 때때로 협정을 무시하고 한나라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더구나 얼마 후에는 한나라의 장군 진희가 흉노에 넘어가 한왕 신과 공모하여 침공해 오기도 했다. 한나라는 장군 번쾌를 보내 여러 군, 현을 간신히 탈환하기는 했지만 국경선 밖까지 토벌하려 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변경의 요새로 파견된 한나라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 때문에 묵특은 국경의 지방을 마음대로 침략하여 한나라를 괴롭혔다. 이에 유방은 할 수없이 방침을 바꾸어 회유책으로 나갔다. 그래서 유경의 제안대로 사자를 보내 황족의 딸을 공주라고 속여서 선우에 시집 보내면서 매년 일정량의 솜, 비단, 술 쌀, 양식을 헌납하기로 하고 형제국이 되는 조약을 맺어 화친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얼마 동안은 묵특도 한나라에 대해 침략 행위를 삼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한을 배반한 연왕 노관이 부하 수천 명을 이끌고 흉노에 투항, 상곡군 동쪽에 출몰하여 주민을 괴롭혔다. 세월이 흘러 유방이 죽고 혜제, 여후의 시대가 되자, 한나라는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는 듯 했으나, 흉노가 한나라를 멸시하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묵특으로부터 여후에게 한 통의 편지가 보내졌다. 그것은 희롱을 늘어놓은 편지였다. (사기 2권 '계포' 편 참조)
'장맥분홍'이라는 말이 있다. 혈기가 터질 듯이 넘쳐 도저히 욕정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자기도 홀아비이고 당신도 과부이니 우리 한번 어울려 정분을 풀어 보자는 노골적인 언사로 가득 찼던 것이다. 톡톡히 망신을 당한 여태후는 당장에 흉노 토벌군을 내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렸다.
"선제께서도 평성에서 고역을 치르셨습니다."
여후는 하는 수없이 출병을 중지하고 회유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싸울 것이냐, 화평할 것이냐
세월이 흘러 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흉노와 화친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문제 3년(기원전 177년) 5월에는 흉노의 유현왕이 오르도스에 침입하여 상군의 요새를 공격해 왔다. 그러면서 한나라에 귀속해서 변경 방위를 맡고 있던 하나라 소속의 오랑캐족을 살해하고, 나아가 부근의 주민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자 문제는 승상 관영에게 토벌을 명령했다. 이에 관영은 전차대와 기마대 8만 5천을 이끌고 우현왕을 공격하여 그 군대를 요새 밖으로 몰아 냈다. 그런데 문제가 태원에 행차한 틈에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문제는 급히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관영의 흉노 토벌도 중지되었다. 그 다음해에 묵특 선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서한이 한나라에 도착했다.
"천제가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 정중히 황제에게 문안하노니, 편안하신가. 일찍이 황제께서 나에게 화친을 요청했을 때 나는 그 취지를 양해하여 화친을 받아 들였소. 그럼에도 귀국의 국경 수비대가 우리 우현왕의 영지에 침범하고, 또한 우리 쪽의 현왕도 나에게 무엇 하나 상의함이 없이 귀국의 수비대와 일을 벌였소. 이들은 모두 양국 군주의 약속을 어기고 형제국의 우의를 저버리는 행위였소. 이 사건에 관해서 황제로부터 매번 책망의 편지를 받았으므로, 나는 사자를 통하여 회답을 보냈소. 그런데 나의 사자는 귀국에 간 채 돌아오지 않고, 또한 귀국에서도 그 후 한 사람의 사자도 오지 않았소. 그 이래 양국은 화친 관계를 끊은 채 오늘에 이르렀소. 원래 귀국의 수비대가 약조를 깨뜨렸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긴 하지만 나는 이번에 우현왕에게 벌로써 서방 월지 토벌을 명령했소. 우리 군대는 하늘의 가호와, 단련된 병정과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항복시키거나 혹은 참살로 토벌했고 아울러 그 인접 26개국을 평정하여 모조리 우리 흉노에 병합했소. 이로써 활을 무기로 삼는 모든 민족은 완전히 통합되어 북방은 평정된 것이오. 현재 나의 희망은 무기를 거두고, 병사와 말에 휴식을 주며, 이제까지의 원한은 씻어 버리고 화친 조약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옛날처럼 변경 백성을 안심시키고 어린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늙은 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천하를 이룩하여 이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이라오. 나는 이와 같은 희망에 대해서 황제의 동의를 얻고자 사신을 보내어 이 서한을 드림과 동시에 낙타 1두, 승마 2두, 마차 8두를 헌상하는 바이오. 만일 황제께서 우리 흉노가 한나라 국경에 근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명령을 내리시어 수비대나 주민을 국경에서 멀리 보내기 바라오. 또한 나의 사자가 무사히 도착했을 경우에는 6월중에 귀국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기 바라오."
서한을 보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화친이냐 싸움이냐를 놓고 그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중신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선우는 월지를 쳐부수고 지금 승운을 타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공격을 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설령 흉노의 영토를 빼앗았다 하여도 그 불모의 땅에 우리나라 백성을 이주시킬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선우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최상의 방책인 듯합니다."
이렇게 하여 선우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산다
그 얼마 후에 묵특이 죽자, 그 아들 계육이 즉위하여 노상선우라고 칭했다. 노상선우가 즉위하자, 문제는 고조의 전례의 따라 황족의 딸을 공주로 꾸며서 선우에게 짝지우기로 하고, 그 후견인으로서 연나라 출신의 환관 중행열을 동행시켰다. 중행열은 흉노로 가는 것이 꺼림칙하여 그 임무를 사양했으나,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중행열은 흉노로 가는 길에 다짐을 하였다.
"두고 보자. 강제로 보낸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다. 나는 반드시 한나라의 화근이 될 것이다."
그리고 흉노 측에 도착하자마자 곧 선우에게 귀순하더니 곧바로 선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흉노들은 전부터 한나라의 비단이나 면, 음식 등을 애용하고 있었다. 중행열은 우선 그 점을 지적하여 선우에게 진언했다.
"흉노는 인구로 본다면 한나라의 일개 군보다도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한나라에 필적하는 힘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의식과 풍습이 한나라와 달라서 한나라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우께서 지금 흉노 본래의 관습을 버리고 한나라의 물건을 즐기시는데 이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가서는 한나라가 자기 나라 물자의 2할만 흉노에게 소비하게 하면 흉노는 완전히 한에게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한나라의 비단이나 면을 입은 자에게는 그것을 입혀서 가시밭 속을 달리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면은 곧 여지없이 찢어지고, 모피, 수피가 얼마나 뛰어난 물건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나라의 음식을 입수하시면 즉각 버리시고, 흉노의 유제품이 얼마나 편리하고 맛이 좋은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중행열은 이렇게 진언함과 동시에 선우의 측근에게 흉노의 인구 및 가축 수를 상세히 조사하여, 그 통계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어서 중행열은 한나라에 보내는 서한의 양식을 고치도록 했다. 지금까지 한나라에서 흉노에게 보내오는 서한은 한 자 한 치의 두루마리가 사용되었으며,
"황제,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문안하노니, 편안하신가."라고 시작되어 헌납한 물건과 용건을 적는 것이 통례였다. 그래서 중행열은 선우가 한나라에 보내는 서한에는 한 자 두 치의 두루마리를 사용하게 했으며, 봉인을 크게 하고는,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 삼가 한의 황제에 문안하노라. 편안하신가."라고 오만한 태도로 물건과 용건을 기록하게 했다. 또한 중행열은 한나라 사신의 언동에 눈을 크게 뜨고 부라렸다. 어느 때인가 사신이, "흉노의 풍속은 노인을 천대한다."라고 비난했다. 중행열은 때는 이때라고 생각하여 사신을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묻겠는데, 너희들 한나라 풍습으로는 젊은이가 변경 수비병으로 종군할 때 늙은 부모가 자기를 희생하고 따뜻한 의복을 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이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러자 사신이 되물었다.
"아니,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에 중행열이 말했다.
"그것이 당연하다면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는 말이 어떻게 나오는가. 말할 것도 없이 흉노는 싸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싸우지 못하는 노약한 자가 맛있는 것을 강건한 젊은이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부자가 서로 오래도록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흉노는 부자가 한 천막 속에 거주하며,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계모를 아내로 삼거나, 형제가 죽으면 나머지 형제가 미망인을 자기 아내로 삼거나 하지 않는가. 게다가 흉노는 의관도 없으며 예절도 없다."
그러자 중행열이 사신을 비난했다.
"한나라의 사자여, 흉노의 풍습을 모른다면 가르쳐 주지. 흉노의 생계는 모두 축산으로써 이룩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축의 고기를 먹으며 그 젖을 마시고 모피를 입는다. 그리고 가축에게 필요한 풀과 물을 구해서 계절 따라 이동한다. 그러므로 언제 전쟁이 터지더라도 말타고 활을 쏘는 훈련이 되어 있으며, 평상시에는 편안하고 온화한 생활을 즐길 수가 있다. 법은 간단하여 실행하기 쉽고 군신 관계도 단순하여 한 인간의 몸처럼 움직이기 좋게 되어 있다. 부자, 형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자가 미망인을 자기 처로 하는 것은 가계의 단절, 종족의 절멸을 막기 위함이다. 때문에 흉노는 언뜻 보기에는 문란한 것 같지만 혈통이 끊기지 않고 존속해가는 것이다. 분명히 중국에서는 계모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때문에 친척끼리 점점 사이가 멀어져 나중에는 서로 다투고 죽이기까지 하게 된다. 혁명이 일어나면 황제의 성이 바뀌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예의라고 해도 오늘날에 와서는 나쁜 풍습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상하가 서로 원한을 품거나 시기를 하면서 사치만을 좇고, 그것을 위해서는 생계조차 돌보지 않는 판국이 아닌가. 그리고 의식을 농경, 양잠에 의지하고 자위를 위해서는 성벽을 의지하는데, 그렇게 때문에 만일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백성들은 충분히 싸우지도 못하고 평시에도 생산에 쫓길 뿐 잠시도 여유없는 것이다. 흙집에 사는 가련한 한인이여, 자기 나라의 실정을 알았다면 이제부터는 공연히 아는 척 안 하는 게 좋겠다. 또 관을 써봤자 뾰족한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런 말이 오고 간 후부터 한나라 사신이 무슨 말을 꺼내면 중행열은 듣기도 싫다는 듯이 이렇게 일축해 버렸다.
"한나라 사자여, 쓸데없는 수다는 떨지 말게. 너는 한나라가 흉노에게 보내오는 비단, 면, 쌀, 누룩을 정량대로, 또 좋은 것을 가져오기만 하면 돼. 양과 질이 두루 완전하면 그것으로 족해. 만약 수량이 모자라거나 품질이 조잡할 경우에는 가을 수확때에 기마대를 몰아 너희를 노작물을 짓밟을 테니 그쯤 알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쉴새없이 선우를 부추켜 한나라의 틈을 엿보게 했다. 그 후 문제 14년, 드디어 흉노의 선우가 14만 기를 이끌고 침입하여 다수의 주민을 포로로 잡고, 많은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기습부대를 풀어 옹 지방의 감천궁까지 점령하였다. 문제는 급히 전차 1천 대, 기병 10만을 출동시켜 장안 부근 일대에 방위선을 구축하여 흉노의 침략에 대비하는 한편, 계속 전차, 기마의 대군을 내보내 반격을 가해 나갔다. 그러자 선우는 한나라 영토에 머물기 한 달 남짓해서 깨끗이 요새밖으로 철수해 버렸다. 한나라 군사가 이를 추격했으나 아무런 전과도 없이 곧 철수해 버렸다. 흉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한나라를 멸시하여 매년 국경을 침범해서는 다수의 주민을 사로잡고 손에 닿는 대로 약탈해 갔다.
이렇게 하여 중행열은 한, 흉노의 화친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이 예언한 대로 '한나라의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노상선우가 죽은 후에도 그 아들 군신선우를 섬겼다. 그 사이 양국은 전투와 화해를 되풀이했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의 입장에 몰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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