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부록 管仲 略史(1/2)
중국 재상열전 중에서
管仲 略史
관중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관포지교(管鮑之交)도 그렇다. 친구 포숙아(鮑叔牙)와의 지극한 우정을 나타낸 말이 바로 관포지교가 아니던가! 또 '의식(衣食)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는 말도 관중의 정치 행태와 신념을 나타낸 글귀로 널리 쓰이고 있는 유명한 말이다. 춘추 시대의 시대적 조류를 이끌어간 명재상으로 꼽히는 제나라의 관중은 기원 전 7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천여 년 전의 인물이다. 당시의 중국은 이미 지배력을 잃고 있던 주왕조(周王朝)를 대신하는, 실력있는 제후(諸侯)가 패자(覇者)로서 열국을 직접 호령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패자란 우선 주왕조의 종주권(宗主權)을 존중하면서 <제후 회의>를 소집하여 회맹(會盟)을 행하고 중원 제국을 위협하는 이적(夷狄)의 격퇴와 중원의 질서 유지를 주된 일로 삼아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춘추 오패 중 첫 패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이 제나라의 환공이다. 제나라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있었던 나라로 중원에서 볼 때는 동쪽에 위치한 한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환공의 대에 이르러 두각을 나타내며 일약 패자로서 춘추 시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바로 환공을 보좌한 명재상 관중의 정치 수완에 의한 것이었다. 관중이 죽은 뒤 백 년 후에 출생한 공자는 이 선배 정치가에 대하여, 그 패도(覇道) 사상(思想)에는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관중이 수행한 정치적 실적에 대해서는 이렇게 극찬했다. 환공이 전쟁이라는 수단에 호소하지 않고 제후를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은 관중의 활약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관중은 환공을 육성시켜 제후의 맹주가 되게 하고 천하의 질서를 회복했다. 그 은혜는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만약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만족(彎族)의 풍속을 강요당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또 <<사기 (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도 고어(古語)를 인용하여 관중이 재상으로서 훌륭하게 군주를 보필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군주의 장점을 조장하고 단점을 교정했기에 비로소 나라 안은 평화롭게 다스려진다. 곧 관중 없이 환공의 패업이 없고 당시 중원의 평화도 보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관중의 출신은 거의 불분명하다. 「사기」에 의하여 몇 가지 다음의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관중은 영상(穎上)에서 출생했다. 영상은 지금의 안휘성(安徵省) 영상현의 남쪽, 영하(潁河)와 회하(淮何)의 합류 지점으로 당시의 세력 배치상으로 말한다면 제나라 영역이라기보다는 송(宋)나라의 경계 지대다. 포숙아와는 죽마지우로 서로 무엇이든 함께 하였다. 진작부터 포숙아는 관중의 남달리 뛰어난 재능을 꿰뚫어 보았다. 관중은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수입 액수로 자주 포숙아를 속였다. 그러나 포숙아는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끝까지 우정을 버리지 않았다. 포숙아와 관중은 생애 변함없는 우정을 맺은 둘도 없는 친우로서, 그 지극한 우정에 관해서 관중은 훗날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내가 옛날 가난했을 때,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한 일이 있었다. 이익을 나누는 판에 내 편에서 더 차지했는데도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에게 이름을 얻게 해주려고 계획했던 일이 도리어 그를 궁지에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었지만 그는 바보라고 욕하지도 않았다. 일에는 잘될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는 건을 포숙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만 이 내용에 따른다면 관중의 청년 시대는 참으로 가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장사를 했다는 점으로 보아 사회적 출신 성분이 신통치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사회 계층을 대충 분류해 보면 천자 밑에 제후가 있고, 또 그 밑에 경(卿), 대부(大夫), 사족(士族)의 가신단(家臣團)이 지배 계급을 구성하고 있었다. 경은 대신의 가문, 대부는 그것에 버금가는 지배 계층의 신분이다.그러나 관중의 출신 계층은 기껏해야 이러한 지배 계급의 말단에 위치한 사족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 사실은, 같은 춘추 시대의 명재상으로 일컫는 정나라 자산(子産)이 경의 출신, 제나라의 안영(晏孀)이 대부 출신이었다는 점에 비하면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으며, 역(逆)으로 말할 때 이러한 사실은 관중이 정치가로서 얼마나 출중한 성품과 비범한 역량의 소유자였나를 여실히 가리키고 있다고도 할 것이다. 관중이 언제 어떤 사정에서 제나라에 거주하게 되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당시의 제왕(齊王)은 태공망(太公望)으로부터 계산하여 십삼 대째의 희공으로, 희공에게는 제아(諸兒), 규(糾), 소백(小白)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관중은 이중 규의 스승(傳)으로 기술되어 있다. 물론 희공이 죽은 이후의 일이지만 그의 인물 됨됨이와 식견이 인정된 다음의 일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한편 친구인 포숙아는 소백의 부(傳)에 임명되었는데 이 인사(人事)를 둘러싸고 <관자(管子)> 대광편(大匡篇)에 다음과 같은 흥미 깊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포숙아는 이 임명에 불만을 갖고 투덜댔다. 그는 막내인 소백에게 계승할 자리가 돌아을 가능성이 없음을 짐작하고 그러한 사람의 선생에 취임하더라도 장래의 전망이 열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관중은 병을 칭탁하고 집에 틀어박혀 버린 포숙아를 찾아가 제아, 규, 소백 세 사람의 인물 비교를 시도하면서 소백(小白)의 미래가 반드시 무망(無望)한 것은 아니라고 설득한다.
"결국 장래의 제나라를 짊어지고 설 사람은 규와 소백일 것이오. 나는 소백의 재능을 인정하네. 그는 작은 지혜를 농하지 않고 높은 견지에서 사물을 포착하는 형의 인물이지. 또한 포부가 남다르게 웅대하므로 여간해서 남에게 쉽게 이해되지를 않아. 순서상으로 말하면 제아 다음에 규이고, 소백보다는 규가 먼저지만 불행히 장래 어쩌다가 우리 제나라에 재난이 닥칠 경우 규로서는 좀체 난국을 극복해 나가리라고 믿어지지 않는다네. 숙아여! 그렇게 되었을 경우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는 자네 힘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라네."
포숙아는 관중의 설득을 듣고 비로소 소백의 스승이 될 것을 승낙했다고 한다. 소백이 곧 후일의 환공인 것이다. 이 얘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관중에게는 정치가로서 불가결한 요건의 하나인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지만, 얘기 그 자체가 아무래도 너무 신통하다는 느낌이 든다. 대개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훗날에 지어낸 얘기이리라. 그런데 드디어 희공이 죽고 장자인 제아가 뒤를 이어 십사 대째의 군주가 되었다. 양공(襄公)인 것이다.그런데 양공은 도저히 군주의 그릇이 아니었다. 무도한 행동이 많고 누이와 사통하는 등 음란하더니 결국 사촌인 공손(公孫) 무지(無知)라는 사람의 손에 걸려 살해되었다. 이때 규는 관중과 함께 가까운 노(魯)나라로 망명하고 소백도 포숙아와 함께 거로 달아나 난을 피했다.그러나 공손 무지의 자리 또한 반년도 유지되지 않았다. 무지는 옹름 이하 반대파 대부들의 손에 걸려 덧없는 최후를 마친다. 공석이 된 군위를 둘러싸고 급거 중신 회의가 열리고 노나라에 가 있는 공자 규와 거에 있는 소백에게 사자가 보내졌다. 관중은 별동대를 이끌고, 제나라의 도읍지 임치성을 향해 가는 소백군을 요격했는데 친히 활을 쥐고 소백을 겨냥했다. 화살은 소백에게 명중하여 소백은 덜컥 넘어졌다. 관중은 통쾌하게 소백을 해치웠다고 규의 본대에 보고했다. 경쟁 상대를 넘어뜨리고 안심한 규는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유유히 임치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관중은 여기에서 중대한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소백을 겨냥했던 화살은 분명히 맞추기는 했는데 허리띠의 쇠고리에 의해서 소백은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현명하게도 소백은 그 자리에서 죽은 시늉을 하다가 관중이 물러간 뒤를 틈타 다시 임치를 향해 달렸다. 이리하여 규를 옹호하는 노나라 군이 제나라 영내에 들어섰을 때에는 소백은 이미 제후에 옹립되어 있었다. 노나라는 전후를 돌봄이 없이 일전을 시도했으나 어이없이 패하고 제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지원하던 공자 규를 스스로의 손으로 살해해야만 하는 파국에 몰렸다. 제나라의 군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형제간의 골육상쟁은 소백 진영의 승리로 끝났던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관중의 처분이었다. 소백 곧 환공은 관중으로부터의 화살을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한 기억도 생생했다. 될 수만 있다면 가증스러운 관중놈을 눈앞에 꿇어앉혀 놓고 난도질을 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한 환공에게 순순히 관중의 존재 가치를 설득한 것이 다른 사람 아닌 포숙아였다. 그는 제나라의 신정권(新政權)에 있어서 관중은 없어서는 안 될 인재임을 역설했다.
"신은 다행스럽게도 처음부터 우리 군주를 다룰 수가 있어 오늘 이렇게 우리 군주가 드디어 제후(齊侯)의 자리에 앉는 영광을 함께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신(臣)으로서는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제나라 일국만을 통치하실 심산이라면 고혜와 저, 둘만의 보좌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군주께서 천하의 패자가 되시길 바라신다면 관중 외에 달리 적임자가 없습니다. 관중을 중히 쓰시면 우리 나라는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관중을 획득해야 하옵니다."
환공으로서도 신뢰하는 포숙아의 의견일진대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곧장 노나라에 대하여 관중의 인도를 요구했다. 노나라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관중은 이 일이 있을 것을 예기하고 벌써 귀국의 결의를 굳히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규를 섬기냐 소백을 섬기냐는 이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제나라를 부강케 하는 일이었다. 관중은 그의 신병을 인수하고자 포숙아의 명을 받고 온 습붕을 따라 귀국의 길에 올랐다. 환공은 관중을 만나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해 보자, 새삼스럽게 그 식견에 경복하여 재상에 임명한 후 국정을 모두 맡겼다. 드디어 정치가로서의 관중이 연출할 무대는 전개되었던 것이다.
관중의 정치의 특징은 여론을 중시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富)하게 하는 것에 있다. 백성이 부하면 다스리기가 쉽고 백성이 가난하면 다스리기 어렵다. <관자(管子)> 치국편(治國篇)에 있는 바와 같이 국가를 강대하게 만드는 길은 첫째 백성의 생활 안정을 꾀함이 선결인 것이며, 경제 정책에 모든 국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 방법으로서 그는 다음의 다섯 항목의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 농업의 보호 장려
. 소금,철 금 그밖의 중요 산업의 생산 관리
. 균형 재정(均衡財政)의 유지
. 물자의 유통 및 물가의 조정
. 세제(稅制) 및 병역의 정비
이천육백 년 전인 당시로서는 극히 선견지명에 뛰어난 정책이었다. 그 결과 제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국력이 증대하여 환공은 패자로서 천하를 호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관중이 정치를 어떻게 다루었던가는 <관자(管子)> 칠십육 편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관자>란 책은 훗날 관중 연구자의 손에 의해 상당 부분이 보태지고 꾸며졌다는 평이며 그 내용을 모조리 관중 자신의 사상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지금 관자 중에서도 관중 자신의 손으로 쓰여진 가능성이 짙다는 <경언(經言)> 구편 중의 목민편에서 그의 정치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국의 지배자란 사계(四季)를 통하여 생산 계획을 원활히 진행케 하여 나라 경제를 풍요하게 만들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자가 풍부한 나라에는 아무리 먼 곳으로부터도 백성은 모여드는 법이며, 개발이 잘된 나라에서 달아나는 백성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하루하루 생활하기가 곤란한 사람에게 예의를 설득해 본들 아무 소용도 없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만 한다면 도덕 의식은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다.
군주가 재정상(財政上)의 무리를 하지 않을 것, 이것이 민생 안정의 근본인 것이다. 생활이 안정되면 백성은 예(禮), 의(義), 염(廉), 치(恥)의 덕을 잘 지키며 이리하여 군주의 명령은 나라의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든다. 지배자는 무엇보다도 경제를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형벌 등은 2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 민생을 안정시키고 도덕 의식을 높일 것, 이것이 국가존립의 기초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신령(申靈), 종묘(宗廟), 조상을 숭배한다. 말하자면 종교심을 널리 보급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일이다. 나라는 네 가닥 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네 가닥 줄 중 한 가닥이 끊기면 안정에 결여를 가져온다. 두 가닥이 끊기면 위기에 빠진다. 세 가닥이 끊기면 전복된다. 네 가닥이 다 끊어지면 멸망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안정은 결여되더라도 만회할 수가 있다. 위기에 빠지더라도 탈출할 수가 있다. 전복됐다 하더라도 재건할 방법은 남아 있다. 그렇지만 멸망해 버려서는 이미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네 가닥의 줄이란 무엇인가. 예, 의, 염, 치 네 가지 덕이 그것이다. 예(禮)란 절도(節度)를 지킬 것, 의(義)란 자기 선전을 하지 않을 것, 염(廉)이란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을 것, 치(恥)란 남의 악행에 끌려 들어가지 않는 일이다. 모두가 절도(節度)를 지킨다면 신분 질서는 평탄하게 유지될 것이다. 누구나 자기 선전을 하지 않으면 거짓이나 허언은 없어진다. 자기의 과실을 숨기는 자가 없으면 부정은 스스로 모습을 감춘다. 남의 악행에 말려드는 자가 없다면 어떠한 악행도 기도할 방법이 없다. 백성의 소원을 살피고 그것을 이루어 줄 것, 이것이 요체인 것이다. 백성의 소원을 무시한 정치는 반드시 앞이 막힌다. 백성은 누구나가 힘들거나 고생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백성의 고생을 없애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백성은 누구나 가난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백성은 누구나 재난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백성의 안전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백성은 누구나 일족이 멸망하는 쓰라림을 맛보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니 군주는 백성들의 집안이 번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의 조건이 충족된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고생을 덜어 주려는 군주를 위해서라면 백성은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려는 군주를 위해서라면 백성은 어떠한 가난에도 참고 넘길 것이다. 안전을 도모하는 군주를 위해서라면 백성은 어떠한 재난이라도 감수할 것이다. 번영을 애쓰는 군주를 위해서라면 백성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백성의 마음을 살피려 하지 않고 그저 형벌에 의해 위압하고 복종시키려 한다면 정치는 온전하게 행해질 수 없을 것이다.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형벌을 엄히 하고 덮어놓고 사람을 처형하여 위협하는 것으로는 정치가 스스로 자기의 묘혈(墓穴)을 파는 것과 같다. 군주된 사람은 앞서 밝힌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마음가짐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이 조건이 채워지기만 한다면 백성은 아무리 먼 곳으로부터도 그리워하여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고생, 가난, 재난, 멸망의 괴로움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면 백성은 커녕 자신에게 심복하고 따르던 측근자로부터도 배반당한다.
'취(取)하고 싶거든 먼저 줘라!'
이것이 관중 정치의 비결이다. 아무리 견고한 요새일지라도 그것만으로 적을 방비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강대한 군비가 있을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적을 격파할 수 없다. 또 아무리 영토가 넓고 물자가 풍부할지라도 그것만으로 백성의 마음을 묶어 놓을 수는 없다. 군주에게 확고한 지도 이념이 있어야 비로소 재난을 미연에 방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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