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3) 과연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진평)
다섯 번 과부된 여자에게 장가들다
진평은 젊을 적에 형인 진백의 집에 살았다. 그런데 형은 진평의 재주를 알아 보고, 자기는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진평에게는 큰 도회지에서 공부하도록 해 줬다. 이런 형의 태도를 그의 아내는 늘 못마땅해 하며, 어느 날 이렇게 투덜거렸다.
"저렇게 밥이나 축내는 시동생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겠어요."
그러자 진백은 크게 화를 냈다. 그리고는 곧장 이혼해 버리고 아내를 친정으로 내쫓았다. 그때 근처의 동네에 장부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녀는 시집만 가면 남편이 곧 죽어 자그만치 다섯 번이나 과부가 된 처지였다. 평소 그 손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진평은 장부에게 찾아가, "손녀를 제게 주십시오."하고 청혼했다. 장부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이웃 동네에 초상이 나서, 진평이 그 집에 가 일을 돕고 있었다. 그때 마침 장부도 조문객으로 왔다가 진평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진평은 이를 눈치채고 핑계를 대어 상가를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장부는 몰래 진평의 뒤를 밟았다. 진평이 들어간 곳은 허름한 초가집이었고 문이라야 고작 거적대기로 가린 것이었다. 하지만 집 앞에는 귀한 손님들이 다녀갔음인지 수레 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장부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는 그 길로 집에 돌아가 큰아들을 불러 말했다.
"네 딸을 진평에게 주었으면 하는데, 어떻겠느냐?"
그러자 아들은,
"진평이라면 가난한 주제에 생업에 힘쓰지 않아 모두 비난하는 자이온데, 하필 그런 사람에게 딸을 준다는 말씀인지요?"하며 반대하였다.
하지만 장부는 끝내 우겨서 진평을 손녀 사위로 삼았다. 결혼 비용도 모두 장부가 지불해 혼사도 무사히 치뤘다. 그러면서 그는 손녀를 불러,
"시댁이 가난하다고 조금이라도 무시해서는 안된다."하고 단단히 훈계하였다. 그 후 진평은 마을 일을 도맡아 했는데, 그는 항상 공평하고 매끄럽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모두 그의 재주를 칭찬하였다.
의심나는 자는 쓰지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
그 후 진승이 반란을 일으켜 천하가 진동할 때 진평은 형 진백과 작별하고 위나라에 찾아가 위왕 구를 만났다. 위왕은 그에게 벼슬 자리를 주어 등용했다. 진평은 이제야 자기의 큰 뜻을 펼 기회라 생각하여 위왕에게 여러 계책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헐뜯는 자들이 많아 결국 진평은 몰래 떠나야 했다. 몇 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항우의 군대가 황하까지 진출하였다. 진평은 청년 수백 명을 이끌고 항우의 군대에 합류하여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드디어 항우가 진나라를 격파하고 함양을 점령한 후, 진평은 높은 벼슬에 임명되게 되었다. 그 뒤 항우가 팽성에 도읍을 정한 자 오래지 않아 유방이 관중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진출할 때, 항우의 부하였던 앙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항우는 진평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 진평이 나아가 쉽게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진평은 벼슬이 한층 높아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이 황하를 건너와 앙을 공격하니 앙은 항복해 버렸다. 이에 항우는 진평이 그들과 무슨 묵계를 하지 않았는가 의심하고 진평을 불러 추궁하려 했다. 진평은 변명해 봤자 통하지도 않을 것을 알고 오직 칼 한 자루만 지닌 채 몰래 도망을 쳤다. 진평은 가까스로 강까지 도망해서 나룻배를 간신히 타게 되었다. 그런데 사공은 첫눈에 그가 망명하는 장군임을 알아보았다. 준수한 외모와 깨끗한 옷차림, 그리고 혼자 몸으로 강을 건너는 것이 영락없는 망명 장군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평이 분명 많은 보물을 몸에 지니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기회를 봐서 진평을 없애고 재물을 빼앗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진평은 그러한 사공의 마음을 알아보고 일부러 옷을 모두 벗은 후 같이 노를 저었다. 그렇게 하니 못된 뱃사공도 비로소 그가 몸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알고 딴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탈출에 성공한 진평은 드디어 수무 지방에서 유방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방은 그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평은 자리를 뜨지 않고 유방 앞에 버티고 앉아 자신의 큰 뜻을 일장 연설하였다. 유방은 처음엔 건성으로 듣다가 어느새 진평이 말에 푹 빠지게 되었다.
"과연 천하의 모사일세."
그러더니 그날로 진평에게 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여러 장수들을 감찰하는 역할을 주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진평이라는 자는 한낱 떠돌이에 불과한 한량입니다. 위나라에서도 쫓겨난 신세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자에게 장수들의 감찰을 맡기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더구나 진평이 여러 장수들에게 재물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반간계의 명수
말이 하도 많아지자, 유방은 장량을 불렀다.
"요즈음 진평에 대해 불만이 많은데, 그대 생각은 어떻소?"
이에 장량이 대답했다.
"진평은 항우에게 개죽음을 당하느니 사람을 쓸 줄 아시는 폐하께 찾아온 사람입니다. 지금 천하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장군들에게 재물을 요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은 앞으로 항우 진영을 이간 공작하려는 반간계를 위한 자금의 조성 때문입니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치며,
"그럼 그렇지. 내 눈이 틀릴 리가 있나."하며 좋아했다.
실제 진평은 그 후 항우 진영의 제일 가는 참모인 범증을 반간계로 실각시키는 등 항우 진영을 이간질하고 스파이를 심어놓아 정보를 빼내는 반간계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것은 항우 진영을 약화시키는 큰 이유가 되었다. 또한 진평은 유방을 호위하여 항우에게 완전 포위되었을 때 거짓 항복 사건으로 유방을 탈출케 하는 등 그 공로가 무척 컸다. 그리하여 진평은 유방을 도와 천하를 재패하게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진평이 주색에 빠져 있는 이유는?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진평은 여전히 '꾀주머니'로서 그 역할을 다하며 유방을 보좌했다. 특히 유방이 흉노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매우 위태로웠을 때 진평의 계교가 빛을 발했다. 진평은 그때 화공에게 절세의 미녀도를 그리게 하고 사신을 시켜 선물과 함께 그 미녀도를 묵특선우의 부인에게 보내게 했다. 그러면서,
"지금 한나라 황제께서는 어려움에 처해 이 절세의 미녀를 선우께 몰래 바치고자 하십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선우의 부인은 그 미녀를 선우에게 바칠 경우 그 미녀에게 사랑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선우에게 졸랐다.
"지금 우리가 한나라 땅을 얻는다고 해도 거기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서로 괴롭히면서 살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이에 묵특선우는 드디어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그리하여 유방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진평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위기에 빠진 유방을 신출귀몰한 꾀를 써서 구해 냈다. 그래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큰 벼슬을 받았으며, 승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데 유방이 죽고 난 후 천하는 여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진평은 밤낮으로 주색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평소부터 진평을 좋지 않게 보던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가 여후를 찾아왔다. 옛날 유방이 여수의 남편인 번쾌를 사로잡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진평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평이라는 자가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치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매일같이 주색에만 빠져 있답니다. 그 자를 처벌하세요."
이 소식을 들은 진평은 그 뒤 더욱 주색에 빠지는 것이었다. 여후는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 그리고는 진평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아녀자의 말은 듣지 말라는 속담이 있지요. 그대는 어떻게 하면 나하고 잘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바라오. 여수의 말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소."
그 후 여후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여씨 일족을 등용시켰고, 진평도 아무런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재상과 장군이 힘을 합하면
그러나 진평이 주색에 빠진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여씨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강성하지만, 그 권세는 오래 가지 못한다. 다만 지금은 납짝 엎드릴 때다.' 진평은 집에 틀어박혀 여씨의 권세를 물리칠 방안을 짜내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의 정치 고문격이었던 육가라는 대신이 찾아왔다. 진평은 누가 온 사실조차 모른 채 생각에 골똘하고 있었다.
"승상 어른,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계십니까?"
"아! 육가 선생이 오셨구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어른께서는 승상의 자리에 계시면서 신하로서는 더 이상의 바램이 없을 처지이십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계시다면 역시 여씨 일족의 전횡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선생의 눈은 정확하시군요. 무슨 방도가 없겠는지요?"
"선비란 원래 태평 시대에는 재상에게 기대하고, 난세를 당하면 장군에게 기대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재상과 장군이 힘을 합친다면 선비는 모두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나는 이것을 항상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지금 이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재상으로는 당연히 승상 어른이 계시고, 장군으로는 역시 주발장군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발 장군은 저와 항상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인지라, 내가 속 마음을 드러낼 때도 그저 농담을 받아들이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승상 어른께 말씀드리는 것이니, 어른께서는 무엇보다도 주발 장군과 친교를 맺어 여시 일족에 대한 견제를 해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자 육가는 여씨를 제압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얘기하였다. 원래 진평은 주발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옛날 진평이 유방에게 등용되어 장수들의 감찰을 수행할 때, 주발이 특히 불만을 터뜨린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평은 여씨 일족을 누르기 위해 옛날의 감정을 털어 버리기로 하고, 즉시 육가의 말대로 주발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또한 그의 생일에는 가무단까지 보내어 축하하였다. 주발 역시 진평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다. 이렇게 하여 여씨 일족의 권세는 차츰 힘을 잃어갔다. 그러면서 진평은 육가에게 경비를 주어 조정 신하들을 끌어들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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