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2) 도대체 여자의 욕심이란 그 끝이 어디일까?(여후)
외아들을 잃고도 눈물이 없는 까닭은?
한편 효혜제가 세상을 뜨자 국상이 발표되어 모든 신하가 관 앞에서 곡을 했다. 그러나 여후는 겉으로 곡하는 소리만 낼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때 장량의 아들인 벽강은 아직 나이 열 다섯밖에 되지 않았으나 매우 똑똑했다. 그는 바로 승상이던 진평을 찾아갔다.
"태후께서 지금 외아들을 잃고도 조금도 슬픔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아시겠습니까?"
"왜 그럴까?..."
"효혜제에게 성장한 아들이 없기 때문에 태후가 중신들에게 위협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승상 어른께서 이 기회에 태후의 조카분들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여씨 가문에게 요직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태후의 두려움도 풀릴 것이며, 중신들도 화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평이 즉시 그 말대로 하니, 과연 여후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목놓아 울며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 그 후 여후는 노골적으로 정사를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다. 여후는 효혜제의 상이 끝나자 태자를 왕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 태자 역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할머니인 여후가 완전히 황제의 권한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나이 어린 황제는 소제라 불리웠는데, 사실 그는 효혜제의 정실 부인에게서 난 아들이 아니었다. 정실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여후가 자기 집안의 미인 한 명을 후궁으로 들여서 낳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생모를 죽이고 정실 부인이 낳은 태자로 꾸몄다. 그 뒤 소제가 4, 5세쯤 되었을 때, 누군가가 이 사실을 그에게 얘기했다. 화가 난 소제는 주먹을 꼬옥 쥐고, "다음에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고 말 테다."하며 분개하였다. 이 말이 그대로 여후의 귀에 들어갔다. 그를 그대로 두어서는 앞날이 불안하다고 여긴 여후는 소제를 전에 척희를 잡아 가뒀던 영항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소제가 병이 깊어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얼마 후 소제는 원인 모르게 죽었다.
천하의 주인은 유씨인가, 여씨인가?
이어 여후는 다음 황제로 유홍을 내세웠는데, 그 역시 아직 나이가 어려 소제라 불렀다. 그리고는 여전히 여후가 황제의 권한을 휘둘렀다. 어느 날 여후가 자기 친정 식구를 제후로 삼을 생각으로 우승상 왕릉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왕릉은,
"선제께서 '유씨가 아닌 사람이 제후로 되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으라' 하셨습니다. 선제의 유지를 받들어야 합니다."라고 반대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여후는 이번엔 좌승상 진평과 대신인 주발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여후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물러나온 왕릉은 진평과 주발을 비난하였다.
"어찌 선제와의 약속을 어긴다는 말입니까. 그리고서 무슨 낯으로 선제를 뵙겠소?"
그러자 그들은 담담하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용기있게 태후에게 맞서는 면에서는 우리가 당신보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 유씨 권력을 지키는 데에는 당신이 우리만 못할 것이외다."
그 후 여씨 일족은 계속해서 제후로 임명되었고,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 역시 제후로 임명되었다. 여수는 이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제후 자리에 오른 여성이 되었다.
유씨 남편들을 감시하는 여씨 아내들
여후는 황실인 유씨와 자기 친정인 여씨 간에 권력 다툼이 격화되자, 한 가지 꾀를 냈다. 즉 여씨의 딸들을 유씨의 제후들에게 시집을 보내 아예 가정에서부터 유씨를 꽉 잡아 버리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조나라 왕으로 봉해져 있던 유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유씨 문중에서 시집온 본처에게 정이 가지 않아 다른 첩에게 사랑을 쏟았다. 그러자 질투심 많았던 여씨 성의 본처는 이 사실을 여후에게 고하고, 또 있지도 않은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편에게 뒤집어 씌었다. '여씨 성에게 제후 자리를 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여후가 죽는 날이면 내 반드시 여씨 일족을 멸하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여후는 분기탱천했다. 곧바로 유우를 잡아들이고는 그를 연금시킨 채 일체의 음식을 못 먹게 만들었다. 그에게 음식을 갖다 주는 사람은 무조건 처벌되었다. 유우는 굶주림 속에서 원한에 사무친 시를 읊었다.
여씨가 권세를 잡으니 유씨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제후라는 건 이름 뿐, 아내까지 강요당했다.
아내가 질투 끝에 나를 팔아넘기니
계집의 밀고가 나라를 어지럽히는데
황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 이 나라 충신들은 어디로 갔는가!
차라리 자결할 것을, 어찌 미리 깨닫지 못했던고,
이렇게 굶어 죽는데도 인정을 베푸는 자조차 없구나.
하지만 여씨의 무도함을 하늘의 힘을 빌어 기필코 보복하리라.
유우는 이렇게 시를 읊고 드디어 굶어 죽었다.
정부와 동성연애자
벽양후 심이기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유방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항상 유방의 부하 노릇을 했으며, 이 후에도 이른바 '가신'이었다. 특히 그는 일찍이 유방이 항우에게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을 때, 항우가 유방의 가족을 체포하려 하자 여후 및 유방의 아버지와 함께 도망가다가 같이 포로가 된 적도 있었다. 천하 통일 후 유방이 죽고 나자, 여후는 심이기를 가까이 하였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은 깊은 관계에 빠졌다. 이 소문은 소리도 없이 퍼져 나갔으며, 마침내 어떤 자가 여후의 아들인 황제 효혜제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러자 효혜제는 크게 화를 내고 당장 심이기를 체포하여 감옥에 처넣고는 처형시키려 했다. 여후는 그토록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이 사실만은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주건이라는 현명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말재주가 좋고 변론을 잘 하며,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장안에 그 명성이 높았으며, 심이기도 그와 사귀려고 몇 번이나 해 봤지만 주건은 만나 주지 않았었다. 그 후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의 집은 너무 가난해 장례 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심이기가 그의 집을 찾아가 열심히 일을 거들고 부의금도 후하게 내며 성의를 보였다. 그러자 주건도 차츰 심이기를 좋게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감옥에 갇혀 위기에 몰린 심이기는 주건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건은 냉정히 거절했다.
"사사로이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주건은 효혜제가 사랑하고 있던 남자인 굉적유를 찾아갔다. 굉적유는 미소년으로서 효혜제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효혜제는 동성 연애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마 사나운 어머니 여후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굉적유를 찾아간 주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것이오. 그런데 지금 벽양후 심이기가 태후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있소.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모함해서 그를 죽이려 한 것이라 믿고 있소. 지금 만일 심이기가 죽게 된다면, 바로 다음날 여후께서 당신을 죽이려 할 것이요. 그런데 왜 당신은 심이기를 구해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오? 황제께 말씀드려 심이기를 풀려나게 한다면 태후께서 크게 기뻐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은 황제와 태후 두 분의 사랑을 몽땅 차지하게 될 터인데 말이오."
이 말을 들은 굉적유는 크게 두려워하여, 황제에게 심이기를 풀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황제도 할 수없이 풀어 주었다. 한편 심이기는 주건이 자기 부탁을 거절하자 매우 원망을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는 주건을 찾아가 후한 선물을 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후 여후가 죽고 여씨 천하가 몰락하자 심이기도 당연히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역시 주건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후에 결국 회남왕에게 철퇴로 맞아 죽었다. 회남왕의 어머니는 반란의 혐의를 받고 자살했었는데, 그때 여후와 심이기가 도와 주었으면 살 수 있었던 것을 전혀 손을 써 주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회남왕은 언제나 심이기를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례에 마음을 빼앗기면 천히도 빼앗긴다
소제 유흥 8년 3월에 여후는 패수 기슭에서 제사를 모시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파란 개 같은 것이 나타나서 여후의 옆구리를 물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도 괴이하여 점을 쳐 보니 죽은 척희의 아들 여의가 복수를 하고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날 이후 여후는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무척 시달려야 했다. 7월에 접어들면서 여후의 병세는 더욱 깊어만 갔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안 여후는 자기 조카인 여록과 여산을 불렀다.
"선제는 천하를 통일한 다음, 모든 대신들을 모아놓고 '유씨 아닌 자가 왕이 되었을 때는 모두 힘을 합해 이를 무찌르라'고 서약을 시켰다. 때문에 우리 여씨 문중이 권세를 잡았다 해도 중신들이 마음 속으로 복종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죽으면 그들은 반드시 반격을 해 올 것이다. 정신 차리고 우선 군사를 모아 궁궐을 지켜야 한다. 장례에 정신을 빼앗기면 천하를 빼앗길 것이다. 명심하도록."
드디어 8월 초하루에 여후는 세상을 떠났다. 여후의 유언에 따라 여산이 상국으로 임명되었으며, 여록의 딸이 황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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