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맹세를 마친 뒤, 비정부는 동지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열 사람은 다 취해서 헤어졌다. 비정부의 집에서 나온 도안이는 곧 극예에게로 갔다. 극예는 도안이의 보고를 냉정히 듣고 나서 강경하게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냐? 사실이라면 증거가 있어야 믿을 수 있지 않나. 어떻든 자네는 비정부의 편지를 가져와야만 죄를 면할 줄 알게."
이튿날 밤에 도안이는 다시 비정부의 집으로 갔다.
"대부께서 천서를 다 쓰셨거든 주십시오. 하루 속히 책나라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비정부는 이미 중이에게 보낼 편지를 써 놓고 있었다. 편지 끝엔 열 사람의 서명이 있었는데 아홉사람의 화압은 먼저 찍혀 있었다. 열번째가 도안이었다. 도안이는 비정부에게 붓을 빌려 자기 이름 밑에다 화압을 쳤다. 그제야 비정부는 정중히 봉함을 하고 밀서를 도안이 손에 꼭 쥐어 주면서 신신당부했다.
"도중 조심하고 조심하게. 이 일이 누설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비정부의 친서를 받은 도안이는 천하에서 제일 가는 보배를 얻은 것만 같았다. 도안이는 나는 듯이 극예의 집에 가서 그 밀서를 바쳤다. 극예가 그 편지를 뜯어 보니 틀림없는 진짜였다. 극예는 일단 도안이를 자기 집에 감춰 두고, 그는 편지를 소매 안에 간직해 넣고, 여이생과 함께 국구 칭호를 받는 괵사에게 갔다. 그들은 그 편지를 괵사에게 내보이고 자세히 설명하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비정부 일당을 조속히 없애 버리지 않으면 당장 무슨 변이 일어날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에 괵사는 그날 밤 궁으로 들어가서 진혜공에게 비정부의 음모를 소상히 고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진혜공은 치를 떨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놈들의 죄를 다스려야겠다. 그것이 비정부의 편지인 건 틀림없겠지?"
이튿날이었다. 진혜공은 아침 일찍이 정전에 나와 자리를 잡았다. 벌써 여이생, 극예의 지휘로 벽 뒤엔 무사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백관의 행례를 받고 진혜공이 비정부에게 물었다.
"이 놈! 네가 과인을 몰아내고 중이를 데려올 생각이라지? 내 너의 죄를 엄히 다스리겠도다!"
비정부는 모르는 일이라고 변명을 하는데 극예가 칼을 짚고 추상같이 호령했다.
"도안이에게 편지를 줘서 중이에게 보내고도 감히 딴소리를 하다니! 그러나 우리 상감께서 복이 많으사 도안이를 이미 성 밖에서 붙잡았다. 그 품 속에서 나온 밀서엔 열 사람의 이름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제 도안이를 끌어내어 대면시킬 테니 너희들은 굳이 변명할 것 없다."
진혜공은 비정부의 밀서를 탑하에 던졌다. 여이생은 그 밀서를 주워 들고 열 사람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무사들은 이름이 불리어진 사람을 차례로 잡아내어 꿇어 앉혔다. 그 때 공화는 휴가를 받고 집에 있던 참이어서 조례에 나오지 않았다. 무사들은 공화를 잡으러 그의 집을 향해 떠났다. 궁중 뜰 아래 꿇어앉은 여덟 사람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유구무언이 었다. 땅 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혜공이 큰소리로 분부했다.
"저 놈들을 빨리 조문 밖으로 끌어내어 참하여라!"
끌려나가는 여덟 사람 중에서 가화가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신이 지난날 선군의 명을 받들어, 그 당시 상감이 피신중이던 굴 땅을 쳤을 때, 신이 일부러 상감을 살려드렸는데 그 공을 벌써 잊으셨나이까? 그 때를 생각하사 상감께서는 이 몸을 살려 주십시오!"
여이생이 꾸짖었다.
"너는 그 당시 전 임금을 섬기면서 우리 주공을 살려 줬고, 이젠 우리 주공을 섬기면서 중이와 내통하였다. 이 간사한 소인배놈! 속히 나가서 죽음을 당하여라."
가화는 할 말이 없었다. 여덟 사람은 산발하고 고랑을 차고 서릿발 휘날리는 칼날 아래서 차례로 죽음을 당했다. 한편 집에 있던 공화는 비정부를 비롯한 동지들이 비밀이 누설되어 모두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황망히 가묘에 들어가서 하직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는 궁에 가서 동지들과 같은 형벌을 받기로 결심했다. 이를 알고 그의 동생 공사가 권했다.
"형님, 가시면 죽습니다. 타국으로 달아나십시오."
공화가 처연히 대답했다.
"비대부가 이번 일을 꾸민 데엔 나의 권고가 많았다. 남을 죽음에 빠뜨려놓고 자기만 산다는 건 대장부의 할 짓이 아니다. 나는 이 세상에 살기 싫어서 죽으러 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죽은 비정부를 저버릴 수 없어서 가는 것이니 더 이상 말리지 말아라."
공화는 포교들이 오기 전에 자진해서 궁에 나아가 죽음을 당했다. 비표는 부친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변장하고 달아났다. 진혜공은 이극과 비정부의 일족을 한 명도 남겨 놓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극예가 간했다.
"죄는 그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옛법입니다. 이제 그들을 다 죽였으니 이만하면 세상에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공연히 많은 목숨을 죽여 여러 사람의 맘을 공포에 몰아넣을 것까진 없습니다."
진혜공은 그제서야 머리를 끄덕이고 그들 일족을 죽이지 않았다. 동시에 도안이의 공로는 높이 평가되었다. 도안이는 밀고한 대가로 중대부의 벼슬에 오르고 상으로 부규 땅 30만 평을 받았다. 한편 진(秦)나라로 달아난 비정부의 아들 비표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진나라에 이르러 진목공을 보자, 땅에 엎드려 방성 통곡했다. 진목공은 그 우는 까닭을 물었다. 비표는 그의 부친이 살해당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일일이 고했다. 그리고 그는 계책을 진목공에게 아뢰었다.
"진후(晋侯)는 귀국의 태산 같은 은혜를 저버리고, 국내의 많은 원한만 사고 있습니다. 궁성 안 모든 신하는 겁에 질려 맘을 놓지 못하는가 하면, 백성들은 불평을 가득 품고 있습니다. 만일 군후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시면 진(晋)나라는 내란으로 뒤집힐 것입니다. 그러면 진나라 군위에 누구를 세우느냐는 것은 오로지 군후께서 맘대로 정할 수 있습 니다."
진목공은 이 일을 많은 신하에게 문의했다. 건숙이 대답했다.
"비표가 진나라를 치자고 말하니, 이는 그 나라의 신하가 자기 나라를 치자는 것입니다. 우선 의리상으로도 그 자의 말은 옳지 못합니다."
백리해가 아뢰었다.
"만일 진나라 백성이 임금을 미워한다면 반드시 안에서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상감은 그 변란이 일어날 때를 기다려서 일을 도모하십시오."
진목공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인도 비표의 말에 의심이 없지 않소. 하루 아침에 아흡 대부가 죽었는데 백성이 평소부터 불평을 품고 있다면 그냥 있을 리 없소. 하물며 우리 군대가 쳐들어갈지라도 진나라 백성들이 안에서 우리를 호응하지 않으면 우리의 공로도 빛날 수 없소."
마침내 비표는 진나라 군대를 출동시키지 못하고, 진나라에 머물면서 대부 벼슬을 지내며 세월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