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나라 세자 화는 원래 본부인의 소생이었다. 그에게는 공자 장이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본부인이 정문공의 사랑을 받는 바람에 세자가 되고 세력을 부릴 수 있었다.그런데 본부인이 죽고, 정문공이 두 부인을 두어 각각에서 아들을 얻은 후에 상황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그 때 남연(南燕) 길씨(桔氏)의 딸로서 정나라 궁중에 와 있는 몸종 여자가 있었다. 이 여자가 아직 정문공을 가까이 하지 못했을 때의 어느 날 밤이었다. 한 훤칠한 장부가 손에 난초를 들고 와 그녀에게 주는 것이었다.
"나는 너의 조상이다. 이제 아름다운 향기로 너에게 아들을 점지하고 너희 나라를 번영케 하리라."
난초를 받고서야 깜짝 놀라 깨보니 꿈이 아닌가. 그런데 방 안엔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해서 그녀는 꿈인가 생시인가 어리둥절했다. 그 때 그녀는 옆에 있는 여관(女官)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꿈 이야기를 하였다. 그랬더니 그 여관이 비아냥거렸다.
"네가 귀자(貴子)를 안 낳으면 누가 낳겠니?"
이날 정문공이 후궁에 들어와 그 꿈을 꾼 여자를 보고는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자기 옆으로 불러 앉히니, 좌우에 모든 여관들이 서로 웃었다. 정문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한 여관이 그 여자의 꿈 이야기를 하며 비웃었다. 정문공이 말했다.
"그래, 그것은 썩 좋은 징조다. 과인이 네 꿈을 현실로 이루어 주리라."
정문공이 그녀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오늘밤에 난초 꽃술을 따서 치마에 차고 오너라. 그것을 표적으로 보이면 너는 내게로 올 수 있느니라."
이리하여 그날 밤 정문공과 길씨 여자가 동침을 하게 되었고 그 여자는 그날로 태기가 있더니 열 달이 지난 후 아들을 하나 낳았다. 이후 정문공은 그 이름을 난(蘭)이라 지었고, 그 여자를 계속 사랑해 궁에서는 그녀를 연길(燕桔)이라 불렀다. 세자 화는 그 아버지가 연길 모자를 지나치게 총애하는 것을 보고, 다음날 자기 지위가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해 비밀히 숙첨에게 이 일을 상의하였다. 숙첨이 대답했다.
"얻느냐 잃느냐는 것은 모두 천명입니다. 세자는 다른 생각은 마시고 그저 효도만 극진히 하십시오."
다시 세자 화는 공숙에게 이 일을 의논했다. 공숙이 대답했다.
"세자께서는 효성만 지극히 하십시오."
세자 화는 대부들의 이런 덤덤한 대답이 불쾌했다. 그래서 세자 화는 그 후로 숙첨과 공숙에게 말을 하지도 않았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한편 세자 화의 친동생 장은 기이한 걸 좋아하고 허황한 걸 즐겼다. 그는 평소에 휼새 날개를 모아 이상한 모양의 관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하루는 대부 사숙이 그 거동을 보고 공자 장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관은 예에 없는 복장입니다. 그러니 공자는 그런 걸 쓰지 마십시오."
공자 장은 사숙의 충고를 아주 고깝게 들었다. 그래서 장은 형인 세자 화에게 사숙을 말할 때마다 좋게 말하지 않았다. 결국 세자 화는 숙첨, 공숙, 사숙 세 대부에 대해서 막연하나마 좋지 못한 감정을 갖게 됐다. 이러던 차에 세자 화가 모든 제후들이 모여 회담하기로 된 영모 땅에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게 됐다. 세자 화는 만일 제환공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온 자기를 이상히 여기면 곤란할 것 같아서, 제나라로 떠나기 싫은 뜻을 솔직히 말했다. 숙첨은 속히 떠나기를 재촉했다.
"그래도 세자께서 혼자 가셔야 합니다."
세자 화는 더욱 숙첨을 원망했다. '이 놈, 두고 보자. 저는 쏙 빠지고 나는 어려운 데 보내서 골탕을 먹일 작정이로구나.' 세자 화는 속으로 자기 나라 모든 대부를 저주하면서 영모 땅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영모 땅에 당도하여 맹주의 행관에 가서는 엉뚱하게도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좌우 모든 사람을 이 방에서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비밀히 고했다.
"우리 정나라 정치는 숙첨, 공숙, 사숙 등 삼족(三族)의 말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전날 수지 땅에서 동맹때 가입하지 않고 저의 아버지께서 도망하듯 돌아오신 것도 다 그 세 대부의 농간이었습니다. 만일 군후께서 우리 나라 세 대부만 없애 주시면 앞으로 우리 정나라는 속국으로서 제나라를 섬기겠습니다."
"거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제환공은 즉시 승낙했다. 제환공은 세자 화와 모의한 걸 관중에게 말했다. 관중이 대답했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모든 나라 제후가 우리 제에게 복종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 제엔 예의와 신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되는 사람이 와서 자신의 아비를 나쁘게 말하는 것이 우선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우호를 맺으려고 온 자가 자신의 본국을 어지럽히고자 꾀하니 이는 지킬만한 신의가 결코 아닙니다. 또 신이 듣건대 정나라 세 대부는 어진 신하로서 백성들이 그들을 삼량(三良)이라고 하여 존경한다 하옵니다. 맹주로서 가장 귀중한 것은 인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이 볼 때 세자 화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주공은 그의 말을 결코 듣지 마소서."
제환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이튿날 세자 화를 만났을 때 그에게 말했다.
"어제 세자의 말을 밤새 생각해본즉 아무래도 작은 일이 아니니 내 나중 정문공과 상의하여 세자의 뜻에 맞도록 처리하겠노라."
정문공과 상의한다는 말에 세자 화는 얼굴이 벌개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제환공에게 서둘러 하직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 때 관중은 화가 귀국하기 앞서 심복을 시켜 화의 간교한 계책을 수행한 정나라 사람에게 알리니, 그 사람은 돌아가자 그 사실을 정문공에게 아뢰었다. 세자 화가 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 정문공에게 다녀온 경과를 보고했다.
"제후는 아버지가 친히 오시지 않은 것을 수상히 여깁니다. 그러니 제와 친교하느니 차라리 초와 우호를 두터이 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문공이 이에 크게 외쳤다.
"이 애비를 반역한 놈! 나라를 팔아먹으려다 이제와 무슨 소릴 하느냐! 저 놈을 당장 감금하여라!"
추상 같은 호령에 무사들이 달려들어 화를 유실에 잡아넣고 밖으로 쇠를 채웠다.그제야 세자 화는 자기의 술책이 누설된 것을 알고, 도망치려고 밤낮으로 벽을 뚫다가 무사에게 들켰다. 정문공은 이를 알고 세자 화를 궁중 뜰로 끌어내 죽였다. 그러자 그의 동생 공자 장은 위험을 느껴 송나라로 달아났다. 그러자 정문공은 사람을 보내 송나라로 도망가는 공자 장을 추격해서 도중에서 죽여 버렸다. 그리고 제환공이 세자 화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 정문공은 공숙을 제나라로 보내 감사하고 마침내 동맹에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