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9장 초나라로 쳐들어가다
3. 鶴이 오랑캐를 막아 주나
忠臣 광연
"우리는 위나라 태사요. 항상 나라의 제사를 맡아 보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부터 본국에 돌아가서 그대를 위해 귀신에게 아뢰야 하오. 만일 우리가 귀신에게 아뢰지 않고 여기서 죽으면 귀신은 결국 우리 모두를 돕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어서 수레를 내주시오. 우리는 제사 지내러 가야 하오."
수만은 이 말을 곧이듣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그들은 위성을 향해 왔다. 그 때 영속은 갑옷을 입고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영속은 두 사람을 보자 크게 놀랐다.
"주공은 어디 계시오?"
"우리 군사는 전멸했소. 속히 오랑캐의 날카로운 창 끝을 피하도록 하시오."
영속은 성문을 열었다. 그러나 예욕은 성문 밖에서 머리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주공과 함께 나갔다가 주공과 함께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 어찌 신하된 사람의 도리라 하겠소. 나는 지하에 돌아가서 주공을 섬기겠소."
예욕은 칼을 쁩아 스스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었다. 그러나 화룡활은 열려진 성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가히 사관(史官)의 전적(典籍)을 잃어선 안 된다."
영속은 석기자와 함께 상의하고, 위의공의 궁중 권속과 공자 신(申)을 데리고 밤에 조그만 수레를 타고 성을 나와 동쪽으로 달아났다. 화룡활은 사적(史籍)을 품에 안고 그들을 따라갔다. 성 안 백성들은 영속, 석기자 두 대부가 이미 떠났다는 걸 듣고 각기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역시 그 뒤를 따라 도망쳤다. 피난 가는 백성들의 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오랑캐 군사는 승승장구하여 즉시 위성으로 쳐들어갔다. 백성 중에 미처 피난을 못 가고 뒤떨어진 자들은 다 살육을 당했다. 오랑캐들은 다시 군사를 나누어 도망가는 위나라 사람들을 뒤쫓았다. 석기자는 궁중 권속을 보호하며 앞서가고 영속은 추격해 오는 오랑캐를 막았다. 싸우며 도망가는 동안에 따라오던 백성들은 그 반수 이상이 오랑캐 칼에 맞아 죽었다. 석기자와 영속이 황하(黃河)에 이르렀을 때였다. 강변에는 송나라 송환공(宋桓公)이 보낸 군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군(宋軍)은 도망온 위나라 공족(公族)들을 영접했다. 이미 준비해 두었던 배들을 강물에 띄우고 그들은 밤을 새우면서 황하를 건넜다. 추격해 오던 오랑캐 적군(狀軍) 은 그제야 물러갔다. 북적 오랑캐는 위나라 곡식을 모조리 약탈했다. 그리하여 위나라 성곽은 거의 무너지고 거리는 텅 비었다. 적군은 노략질한 물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서 돌아갔다.
한편 위나라 대부 광연(廣演)은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위의공의 명을 받고 진(陳)나라에 갔었다. 그는 귀국하던 도중 본국이 함몰하고 위의공이 형택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광연은 주공의 시체나마 수습하려고 형택으로 갔다. 형택에 가까워질수록 길가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피와 살점이 갈수록 낭자했다. 그는 슬픔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한 곳에 이르렀다. 잡초만 우거진 못가에 큰 기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 군후(君侯)의 기가 이 곳에 있으니 주공의 시신도 이 근처에 있겠구나."
그가 몇 걸음 갔을 때였다. 어디선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살피며 소리나는 곳으로 나아갔다. 발이 부러진 어린 내시 하나가 누워 있었다. 광연이 물었다.
"너는 주공이 어느 곳에서 세상을 떠나셨는지 아느냐?"
그 내시는 검붉은 고기 무더기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주공이십니다. 저는 주공께서 피살당하시는 걸 봤습니다. 다리를 다쳤기에 달아나지 못하고 이 곳을 지키며 누가 오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던 중입니다."
무수히 칼을 맞은 시체는 조각이 나 성한 데라곤 없었다. 광연은 그 형편없이 짓이겨진 시신 중에서 그래도 간이 다소나마 손상을 받지 않은 것을 찾아냈다. 그는 간에다 재배한 후 크게 통곡을 하고는 생시에 대하듯 진나라에 갔다온 경과를 보고하며 예를 다했다. 광연이 다시 어린 내시에게 말했다.
"주공의 시신을 거둬 장례 지낼 곳이 없으니, 내가 이 몸으로써 관(棺)이 되겠다."
그리곤 다시 자기가 거느리고 온 하인에게 부탁했다.
"내 죽거든 나를 저 숲 아래 묻고, 새 임금이 서시면 이 일을 알려라."
마침내 광연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기 배를 양편으로 갈라 위의공의 간을 자기 뱃속에 집어넣고는 반듯이 드러누워 눈을 감고 죽었다. 하인은 비통에 젖어 눈물을 흘리며 위의공의 간이 들어 있는 주인의 시체를 숲 아래 묻고, 부상당한 내시를 수레에 싣고 도성을 향해 하수(河水)를 건넜다.
한편 석기자와 영속은 조읍(漕邑)에 이르러 따라온 백성을 세어 보니 남은 자는 겨우 7백20명에 불과했다. 석기자와 영속 두 대부는 서로 상의해서, 1천 명도 못 되는 백성만으론 국가의 체모가 서질 않으니, 공읍(共邑)과 등읍에서 백성 4천여 명을 모아 끝까지 살아서 따라온 7백여 명과 합쳐 5천의 인구를 마련하고, 조읍에다 여사를 세워 공자 신을 군후에 모시니 그가 바로 위대공(衛戴公)이다. 한편 송환공과 허환공(許桓公)도 각기 사람을 보내 위의공의 죽음을 문상했다.
위문공의 즉위
새로 임금이 된 위대공은 전부터 병이 있어 군위에 오른 지 며칠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그리하여 영속은 공자 훼를 군위에 모시고자 제나라로 갔다. 영속은 제환공을 뵙자 그간의 사정을 모두 아뢰고 공자 훼를 모시러 왔다고 아뢰었다. 제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일시 지체하는 바람에 위나라가 큰 곤경을 겪었구려. 이제 공자 훼가 새로 군위에 오르는데 그 뒤를 받쳐야 하겠도다."
이어 제환공이 공자 훼에게 말했다.
"공자가 본국에 돌아가서 종묘를 지키는데 만일 모든 기구를 갖추지 못한다면 이는 모두 과인의 허물이로다."
제환공은 이어 귀국하는 공자 훼에게 좋은 말 4승(1승은 4필을 말함)에다 제복(祭服) 오칭(五稱)과 소, 염소, 돼지, 닭, 개를 각기 3백 척(三百隻)을 싣고 어헌(魚軒: 가마의 일종)에다 좋은 비단 3백 단(端)을 실어 보냈다. 그리고 다시 공자 무휴에게 분부하기를 수레 3백 승을 거느리고 위나라에 가서, 가지고 간 문재(門材)로 문호(門戶)를 세워 주게 조치했다. 공자 훼가 오랫동안 살던 제나라를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 새로 도읍으로 정한 조읍에 이르렀을 때를 전후해, 광연의 하인과 다리를 다친 내시도 함께 이르렀다. 그들은 광연의 일을 세세히 아뢰니 공자 훼는 즉시 관을 갖추어 형택에 가서 죽은 광연의 시체를 수렴했다. 그리고 위의공, 위대공에 대한 발상을 함께 하고 죽은 광연에겐 벼슬을 올리고 그 자식을 등용해 녹을 받게 함으로써 그 아비의 충성을 드높이게 했다. 다른 나라 제후들도 한결같이 제환공의 의기(義氣)를 본받아 위나라에 많은 부조를 보내니 이 때가 주혜왕 18년 12월 겨울이었다. 그 이듬해 위후(衛侯) 공자 훼는 개원을 하니 그가 위문공(衛文公)이다. 위문공은 궁에다 수레를 30승밖에 두지 않았다. 살아 남은 백성들은 가난하고, 오랑캐에 짓밟힌 강토는 황량하기 이를데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위문공은 베옷을 입고, 비단으로 관을 만들어 쓰고 음식과 국도 채소만으로 했으며,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까지 정사를 보며 백성들과 함께 나누고 백성들을 위로하니 위문공의 어진 덕을 칭송치 않는 백성이 없었다.
한편 제나라 공자 무휴는 자신이 데리고 온 무장병 3천 명을 조읍에 머무르게 했다. 즉 오랑캐가 다시 침범하지 않도록 방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매부인 위문공이 일단 안정될 때까지 주둔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잠시 귀국해야 할 일이 생겼다. 공자 무휴는 병사들에게 단단히 일러 두고 일단 본국으로 돌아와 아버지 제환공에게 위문공이 나라를 일으키는 모습과 아울러 광연이 자기 배에다 선군의 간을 넣고 죽은 일 등을 보고했다.이 말을 듣고 제환공이 찬탄했다.
"무도한 임금에게도 그렇듯 놀라운 충신이 있었구려!"
곁에 있던 관중이 아뢰었다.
"지금 위나라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한 일은 나중 백성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적당한 곳에다 성을 쌓아 주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니 이번에 위나라 도읍을 세워 주십시오. 우선은 번거롭고 수고스럽지만 실은 오랫동안 평안할 수 있는 방도입니다."
제환공은 맏사위인 위문공에게 가능한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 말이 대단히 좋소."
제환공은 각국의 제후들에게 연락하여 함께 위나라 조읍 땅에 대역사(大役事)를 시작하기로 했다. 바로 그 때였다. 형나라에서 급한 소식이 전해왔다. 오랑캐가 위나라의 대 역사를 방해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는데 지금 형나라 국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급한 보고를 받자 제환공은 서둘러 관중을 불러 상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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