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잠시 투곡어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관중이 살았던 시기에 관중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인재가 그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전해지고 있으며, 관중조차 진심으로 탐냈다는 초나라의 영윤 자문(子文)이 바로 그였다. 그의 조부는 투약오(鬪若敖)였는데 운나라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서 투백비를 낳았다. 그런데 투백비가 아직 어릴 때 투약오가 죽는 바람에 운나라 여인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투백비는 운나라에 가서 살며 그 곳 궁중을 드나들었다. 그 때 운나라 궁중의 운부인은 투백비를 매우 아꼈다. 잘 생긴데다가 지혜가 남달랐던 것이다. 한편 운부인에게 투백비와 나이가 비슷한 운녀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들 둘은 소꿉동무로 함께 자랐다. 어른들은 이들 둘이 점차 장성해 가면서도 같이 노는 걸 그저 대견한 듯이 바라볼 뿐 그대로 뒀다. 어느덧 둘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어른들은 이를 몰랐다. 마침내 운부인의 딸이 아이를 가졌다. 그제서야 운부인은 깜짝 놀라 투백비의 궁중 출입을 금하고, 자기 딸 운녀를 병든 것으로 소문을 내어 궁궐의 별실 속에 감금하다시피 감춰 놓았다. 빠른 것은 세월이라 그런 중에도 운녀의 뱃속의 아이는 열 달이 되니 세상에 태어났다. 사내아이였다. 운부인은 딸이 낳은 사내아이를 시녀에게 시켜 비밀히 몽택(夢澤)이란 연못에 갖다 버리고 남편인 운후에게는 딸의 부정을 감쪽같이 숨겼다. 한편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한 투백비는 혼자서 괴로워하다 마침내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나라인 초나라로 돌아갔다.
어느 날 운후는 몽택으로 사냥을 갔다. 그는 몽택 물가에 맹호 한 마리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좌우에 명하여 범을 잡도록 했다. 화살이 빗발치듯 날았으나 한 대도 범을 맞추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범은 화살이 날아와도 두려운 빛도 없이 꼼짝하지 않으므로 운후는 괴이하게 여겨 못 가까이 가서 범의 동정을 살필 것을 명하니, 명을 받은 자가 동정을 살피고 돌아와 아뢰었다.
"범이 갓난아기에게 젖을 빨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운후는 매우 감탄했다.
"그 갓난아기는 보통 아기가 아니라 신의 자식일 것이다. 갓난아기와 범을 놀라게 하지 말라."
운후는 다른 곳으로 가서 사냥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 낮에 있었던 일을 부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부인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부군(夫君)은 모르시겠지만, 그 범이 보호했다는 아이는 첩이 버린 아기입니다."
운후가 크게 놀라 물었다.
"부인은 그 아기를 어디서 얻어다 버렸소?"
운부인은 자초지종을 소상히 말했다.
"부군은 과도히 첩을 허물하지 마십시오. 그 갓난아기는 사실 우리 여아(女兒)가 투백비와 관계해서 난 것입니다. 첩은 여아의 이름을 더럽힐까 두려워서 시자에게 명하여 비밀히 그 갓난아기를 몽택에 버리게 했습니다. 첩이 듣건대, 옛날에 강원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자 물에 버렸다 하더이다. 그러나 날짐승들이 모여들어 그 갓난아기를 끌어내 날개로 보호했기 때문에 강원은 자기 소생이 신물(神物)인 줄을 알고 다시 데려와 길렀고 이름을 기(棄)라 하였습니다. 기는 장성하여 벼슬이 후직에 이르렀고, 드디어 주(周)나라 시조(始祖)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 여아가 낳은 아기를 범이 젖을 빨리며 보호했다니 그 아기도 반드시 후일에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데려와 우리가 기르면 어떻겠습니까?"
운후는 부인의 뜻을 응낙하고, 즉시 사람을 몽택에 보내어 외손자를 데려왔다. 그리고 딸에게 내주어 기르게 했다. 그 이듬해에 운후는 딸을 초나라로 보내어 투백비와 결혼을 시켰다. 초나라 사람은 젖을 곡(穀)이라고 하며 범을 어도라고 했다. 그래서 투백비는 범이 젖을 먹였다는 뜻에서 그 아들 이름을 곡어도라고 지었다. 그리고 자(字)를 자문(子女)이라고 했다. 지금도 운몽현(雲夢懸)에 도향이란 곳이 있다. 즉 자문이 출생한 곳이다. 투곡어도는 점차 자라면서 뛰어난 재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 본 것과 들은 것은 결코 잊지를 않는가 하면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어찌나 조리있고 분명한지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은 누구나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투씨(鬪式) 집안에서는 모두가 칭찬했다.
"장차 집안과 나라를 크게 빛낼 인물이다."
또한 투곡어도는 무예가 출중하여 간혹 문 부인이 출타할 때는 호위역을 분부받곤 했다. 그래서 문 부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자원이 죽자 초나라에는 영윤 벼슬 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래서 초성왕은 투렴을 불러다가 영윤을 삼으려 했다. 투렴이 극력 사양했다.
"지금 우리 초나라는 땅도 넓고 군사도 강합니다. 그러니 제나라에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제나라에는 관중이라는 정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밑에 영척이라는 어진 인물이 있어 정사를 처리하는데 우리가 도저히 당적해낼 수 없습니다. 신은 영척에게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가지고는 제나라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윤 벼슬을 절대로 맡지 못하겠습니다."
초성왕이 한탄했다.
"어찌하여 우리 초나라에는 관중이나 영척 같은 어진 인재가 없단 말인가."
투렴이 아뢰었다.
"찾아보면 어찌 없겠습니까. 투곡어도가 있습니다. 그의 재주는 아직 관중, 영척에 이르지 못하나 나이가 있으므로 곧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성왕은 좌우 시립해 있는 문무 백관들 가운데 말단에 서 있는 투곡어도를 바라보았다.
사실 호감가는 젊은이고 언젠가는 영윤 벼슬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인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직은 어리지 않을까.'
그런데 곁에 있던 많은 신하들이 일제히 아뢰었다.
"투곡어도를 등용하십시오. 그는 나이가 어리지만 반드시 영윤의 직책을 완수하고 중원 땅을 앞에 두고 제나라와 맞겨눌 수 있을 것입니다."
초성왕은 그제서야 그를 영윤으로 삼은 후 모든 신하들에게 분부했다.
"제나라에서는 관중을 중부(仲父)라 부르고 마치 부형처럼 대접했다고 들었소. 따라서 우리 초나라에서는 투곡어도라 부르지 말고 자문(子文)이라 부르시오. 짐은 이제부터 자문과 모든 일을 상의해서 할 것이오."
이후 사람들은 그를 투곡어도라 부르지 않고 영윤 자문(子文)이라 불렀다. 그 때가 주혜왕 13년, 제환공이 위나라를 쳐서 항복을 받고, 위의공의 장자 개방(開方)을 데리고 승전가를 부르며 귀국한 그 이듬해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