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정나라 숙첨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밤새 성내를 순시하며 혹시 있을 줄 모르는 야습을 경계했다. 이튿날 새벽이 되었다. 멀리 초군의 영채가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그 때 숙첨이 크게 웃더니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초군이 모두 달아났으니 안심하여라!"
병사들은 숙첨의 말을 믿지 않고 서로 쳐다보다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물었다.
"모두 도망쳤다니, 뭘로 그걸 아십니까?"
숙첨이 설명했다.
"저 초나라 군막을 보아라. 군막이란 장수가 거처하는 곳이다. 군막에는 공격할 때 북소리가 울리고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진동하는 법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은 어떠하냐?"
숙첨이 하늘과 군막을 한 번씩 가리키면서 말했다.
"공중에서는 뭇 새들이 나르고, 군막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으니 군막이 비었다는 걸 알 수 있도다. 그리고 지금쯤 제나라 구원군이 오고 있다는 걸 초군이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도망쳐 달아나지 않았겠느냐?"
그런 뒤 얼마후 첩자가 와서 제후의 구원병이 곧 정나라에 당도할 것이라는 것과 초군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보고하니 모두들 숙첨의 선견지명에 탄복을 했다. 정나라에선 즉시 신하를 구원하러 오는 제환공을 영접함과 동시에 멀리서 같이 온 송후(宋侯)와 노후(魯侯)에게도 극진한 대접을 하니 이로부터 정나라는 제나라에 충성을 바치는데 두 번 다시 다른 마음을 먹지 않았다.
한편 초나라의 자원은 정나라를 공격했으나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해 불안했기 때문에 그는 아예 자신이 왕위를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원은 먼저 문 부인을 자기 것으로 정복한 연후에 일을 꾀하기로 작정했다. 이 때 문부인은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자원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문병을 한다는 구실로 내궁에 들어가 아예 그 곳에서 기거를 하며 자신의 부하 수백 명을 무장시켜 궁 밖을 엄히 경계했다. 이 사실을 안 대부 투렴(鬪廉)은 궁내로 들어가 자원의 침소로 갔다. 그 때 자원은 마침 거울을 앞에 놓고 수염을 다듬고 있었다. 투렴이 거울을 밀쳐 놓으며 크게 꾸짖었다.
"이 곳이 어찌 신하된 자가 머리에 빗질하고 목욕할 곳이오. 영윤은 속히 궁 밖으로 나가시오!"
자원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 곳은 내 집이며 나의 궁실인데 사사(射師)에게 무슨 상관이 있소?"
"왕후의 귀함은 아무리 형제 사이라도 터놓고 지내지 못하는 법이오. 영윤이 비록 선왕의 동생이라 하지만 신하이니, 신하는 궁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며 종묘를 지날 때는 급히 달리는 법이오. 그 곳에서 기침이나 침만 뱉어도 불경죄라 하거늘 침소야 더 할 말 있겠소. 그리고 이 곳은 과부인(寡夫人)이 계신 곳과 가까우니, 자고로 남녀는 유별하거늘 형수를 위해서라도 영윤은 이런 법도조차 모르고 계시었는가?"
"초나라 정사가 내 손 안에 있는데 어찌 말이 많은가?"
자원이 부르짖더니, 좌우 사람들을 불러 투렴을 포박하게 했다. 그러고는 투렴을 궁중의 행랑채에다 감금하는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문 부인은 사람을 시켜 투곡어도에게 전지를 내렸다.
"곧 궁으로 들어와 어려운 사태를 수습하라."
투곡어도는 즉시 초성왕에게 사실을 아뢰고 투오, 투반 등과 상의하였다. 그날 밤 투씨네 무사들이 왕궁을 에워싸고 있는 자원의 부하들을 잡아 죽이러 갔다. 이 때, 자원은 바깥 형세가 어떻게 된 줄도 모르고 한 궁녀를 끌어안고서 취한 채 자고 있었다. 그러다 소란한 바깥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그는 성큼 칼을 잡고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누가 문을 향하여 마루를 걸어오고 있었다. 살펴보니 투반이 칼을 들고 자기를 노려보면서 오지 않는가. 자원이 크게 꾸짖었다.
"네 놈이 난을 일으켰느냐?"
투반이 가까이 오면서 대답했다.
"나는 난을 일으킨 자가 아니다. 오히려 난을 일으킨 자를 잡아 죽이러 왔다."
이에 자원과 투반은 서로 어우러져 싸웠다. 그들이 불과 수합을 싸웠을 때, 투어강과 투오가 일제히 달려왔다. 자원은 이들 세 사람을 한꺼번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획 돌아서서 문을 박차고 달아나려 했다. 순간 투반의 날카로운 칼이 자원의 목덜미를 향해 야릇한 곡선을 그었다. 동시에 자원의 목이 떨어져 굴렀다. 한편 투곡어도는 갇혀 있는 투렴을 풀어 주고 함께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문 부인 침실 밖에 이르러 머리를 조아리고 자원의 처리를 아뢰고 문안한 뒤 물러나갔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초성왕은 조례가 끝나자 엄한 분부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