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나라는 새로 제나라와 동맹한 처지입니다. 성문을 굳게 닫고 기다리면 제군(齊軍)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입니다. 그러니 사자를 제나라로 보낸 후 장기전 준비를 하십시오."
이 때 세자인 화(華)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다.
"성을 등지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싸워야 합니다."
이렇듯 서로의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정경 벼슬에 있는 숙첨이 비로소 계책을 아뢰었다.
"세 분의 말씀에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만 신은 사숙의 의견을 취하려 합니다. 우선 우리의 원군이 될 수 있는 제환공은 믿을 만합니다. 그리고 제군(齊軍)은 강합니다. 따라서 제나라에 도움을 청한 후 굳게 성문을 닫고 초나라에 항전해 볼 만합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초군의 갑작스런 출동과 그 행동으로 볼 때 머지 않아 스스로 힘을 소모하고 물러가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문공이 숙첨에게 물었다.
"영윤 벼슬에 있는 자원이 직접 장수가 되어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는데 스스로 물러간다니....... 경은 어찌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밝힐 수 없는가?"
숙첨이 대답했다.
"초나라가 비록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지만 병차 6백승을 한꺼번에 투입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선 자원이 쳐들어 오는 까닭은 문 부인에게 잘 보이려는 수작입니다. 그런 자는 승리보다 혹시 패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게 마련입니다. 신이 그들을 확실히 물리치겠습니다. 주공께서는 조금도 염려마십시오."
한참 이렇게 상의하고 있는데 정탐하러 나갔던 자가 급히 돌아와서 아뢰었다.
"초군의 선발이 벌써 외곽성을 부수고 곧 내성(內城)에 당도할 것입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이 말을 듣자 도숙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벌써 초군이 왔단 말이오? 이제는 화평을 청할 시간도 없게 되었으니 우선 주공께서는 피신하십시오."
숙첨이 도숙을 크게 꾸짖었다.
"그대는 어찌 그리도 경망스럽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두려워 마시오. 선발대라고 하면 고작 몇 명이나 되겠소?"
이어 숙첨은 무장병을 성내 도처에 매복시키라고 지시하고는 성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전령했다.
"초나라 군대가 성문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모두가 남의 일처럼 모른 체하고 각자의 일에 열중하라.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도망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시 참하겠다."
그 자신은 날쌘 병사들을 이끌고 궁궐과 성루 등 중요 지점을 경비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한편 군사를 거느리고 누구보다 먼저 정성(鄭城) 앞에 당도한 초군의 선발대 투어강은 성문이 활짝 열려 있는 광경에 크게 놀랐다. 그는 성문 밖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성 위에 전혀 정군(鄭軍)의 동정이 안 보였다. 마음속에 의혹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구나. 이는 우리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임수이니 경솔히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자원이 오면 상의하기로 했다. 그는 정성에서 물러나 5리 밖으로 후퇴했다. 얼마 후에 자원이 대군을 이끌고 당도했으므로 투어강은 정나라 성 안의 광경을 자세히 보고했다. 자원이 높은 언덕에 올라 정성을 바라보니 투어강의 보고와는 달랐다. 성 위엔 정기(旌旗)가 정연하고 무장한 군사가 숲처럼 늘어서 있어 자원은 이를 보자 차탄(嗟嘆)했다.
"정나라엔 훌륭한 신하가 몇 명 있다더니, 그들의 계책은 진정 그 실체를 측량할 수가 없구나. 이번 거사에 만일 성공하지 못하고 내 실수하면 문 부인을 어찌 대하리오. 정나라의 허점부터 탐지하고 성을 공격하리라."
이튿날 초군 후대인 왕손유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자원에겐 사자가 전하는 말이 청천 벽력이었다.
"정탐꾼들의 보고에 따르면, 지금 제후가 군사를 일으켜 송 . 노 두 나라 군후와 연합하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정나라를 구원하러 온다 합니다."
보고를 받은 투어강과 모든 장수들은 감히 전진을 못했다. 초군은 자원의 군령만을 기다리고 제군을 맞이해 싸울 준비를 하나,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는 자원이었다.
"제후가 우리의 퇴로를 끊으면 우리는 앞뒤로 적군 속에 들고 만다. 내 정나라를 쳐 정성 대로까지 왔으니 승리한 거나 다름없다. 모든 군사는 입을 봉해 자그마한 소리라도 내지 말며, 모든 말방울을 태워 버려라."
자원은 전군에게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다. 초군은 그날 밤 구름이 달을 가리는 사이에 소리도 없이 쥐새끼처럼 슬그머니 영채를 떠났다. 정군의 추격을 우려해 군막도 걷지 않고, 기도 그냥 꽂아 둔 채 멀리 달아났다. 정나라 경계를 벗어난 초군은 그제야 종과 북을 울리고 개가를 부르며 마치 정나라를 무찔러 크게 승리한 듯이 도성으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자원은 먼저 사람을 보내어 문 부인에게 승전을 고하게 했다.
"우리 영윤께서 쾌히 이기사 회군하는 중입니다."
문 부인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영윤이 원정을 떠나서 공을 이루었다면 마땅히 백성에게 선시(宣市)하고 상벌을 내리고 태묘에 고할 일이지 이런 미망인에게 무엇을 알릴 게 있단 말이오."
이 말을 전해 들은 자원은 크게 부끄러웠다. 그런데다가 자원이 이기고 돌아왔다는 거짓말이 곧 들통이 났다. 초성왕은 자원이 싸우지도 않고 구원군이 온다는 정탐꾼의 보고에 놀라 도망치듯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