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세자는 군후의 다음 가는 지위입니다. 곡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성 다음으로 우리 진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그런 곳을 세자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다스리겠습니까?"
"곡옥은 그렇다 해도 포와 굴은 황야 지대라 두 공자가 가서 지킬 수 있을 것 같은가?"
진헌공의 말에 동관오가 그럴 듯하게 말했다.
"버려 두면 언제까지나 황야로되 성을 쌓으면 고을이 되고 개간하면 옥토가 되옵니다."
동관오의 말에 양오가 맞장구친다.
"버려진 땅을 고을로 만들고, 변경을 개척하면 일조에 두 고을이 생기게 되니 어찌 기쁘지 않습니까? 진나라는 이제부터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진헌공은 영을 내려 세자 신생에게 곡옥을 다스리게 했다. 또 중이는 포 땅을, 이오는 굴 땅으로 향해 떠나갔다. 태부 두원관이 신생을 따랐고, 호모(弧毛)는 중이를, 여이생(呂飴甥)은 이오를 따라 임지로 떠났다. 또 진헌공은 조숙을 곡옥으로 보내어 세자를 위해 성을 쌓게 했다. 마침내 곡옥은 지난날보다 높고 넓은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성을 신성(新城)이라 했다.
3. 남방에 이는 바람
웅운, 형을 죽이다
한편 남쪽의 초나라에서도 군위를 둘러싼 하나의 음모가 궁중에서 싹트고 있었다. 초문왕이 죽고 장자인 웅간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 건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원래부터 형인 웅간보다 동생 웅운이 재주도 많고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형 웅간은 왕위에 올랐지만 자기보다 모든 점에서 뛰어난 동생 웅운을 항상 미워했다. 그는 동생을 적당한 핑계를 대고 죽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친인 문 부인(文夫人: 식부인 규씨)이 애지중지하고 백성들도 웅운을 칭찬하고 있었기에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웅간은 놀기를 즐겨했다. 그는 사냥을 일삼았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미망인이 된 모친에게 문안 인사도 잘 드리지 않았다. 웅운은 마침내 웅간을 임금 자리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남몰래 무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 때가 웅간이 임금이 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마침내 음모가 빛볼 날이 왔다. 웅간이 사냥을 떠났다. 웅운은 재빨리 무사들을 길목에다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드디어 웅운의 지휘 아래 무사들은 웅간이 탄 수레를 급습하여 웅간을 죽였다. 웅운은 시치미를 떼고 모친인 문 부인에게 가서 거짓으로 고했다.
"형님이 사냥을 떠나셨다가 갑자기 급환에 걸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문 부인은 이 말을 듣자 의심이 났지만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문부인은 속마음으로 사랑하던 둘째아들이 군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사실은 크게 기뻤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문 부인은 모든 대부에게 분부했다.
"웅운을 군위에 모셔라."
웅운은 그리하여 군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초성왕(楚成王)이다. 초성왕은 자기가 죽인 형을 선왕(先天)으로 대우하지 않고, 도호라는 호만 내려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숙부뻘인 자원(子元)에게 영윤(令尹, 초나라의 정승)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이 자원이란 사람이 실로 맹랑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다. 자원은 그의 형수뻘 되는 문 부인을 엉큼하게 뒤로 사모하고 있었다. 원래 문 부인은 누구나 다 아는 천하 절색으로, 과거에 식 부인(息夫人) 규씨이다. 그런 만큼 호색한 자원은 문 부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길 원했다. 그 때만 해도 웅간과 웅운이 어렸으므로 자원은 오만하고 방자했다. 그러나 그도 투백비(鬪伯比)만은 두려워했다. 투백비는 정직 무사하고 재주와 지혜를 겸비한 사람이므로 그 앞에선 감히 방종스레 날뛰지 못했다. 투백비가 주혜왕 11년에 병으로 죽으니 자원은 두려울 게 없어져 마침내 왕궁 곁에 큰 관사를 지었다. 그러고는 날마다 문 부인을 유혹하기 위해 노래와 춤과 음악을 질탕하게 벌였다. 문 부인은 매일 들려오는 노래와 음악 소리를 듣고 시자에게 궁 밖에서 연일 들리는 까닭을 물으니, 자원이 신관을 짓고 즐기는 풍악이라고 했다. 문 부인은 이 말을 듣고 탄식했다.
"선군은 창을 들고 춤을 추사 무예를 습득한 뒤 제후(諸侯)를 정복해서 우리 왕궁엔 제후들의 조공이 그치질 않았다. 그러한데도 우리 초군이 중원에 이르지 못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거늘 영윤은 이를 설치하려 않고 미망인 곁에서 관사를 짓고 음악과 춤과 노래로 세월만 즐기느냐?"
문 부인의 말을 시자가 그대로 자원에게 전하니 자원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부인이 중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으니, 정(鄭)나라를 쳐서 항복을 받아 오지 않으면 어찌 대장부라 할 수 있으리오."
자원은 스스로 중군이 되어 병차 6백 승을 거느리고 투어강(鬪御彊), 투오(鬪梧)에게 대패를 세우게 하여 그들을 전대(前隊)로 삼고, 왕손유(王孫遊) . 왕손가(王孫嘉)를 후대(後隊)로 삼아 마침내 정나라로 쳐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