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공께서 왕명을 받고 모든 제후 앞에 임하는 것인데 왜 병차를 타고 가시려는 겁니까? 병사는 필요없습니다. 주공께서는 예복을 갖추고 회에 가십시오."
제환공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옳은 말이오."
이에 관중은 사람을 보내 북행 땅에다 높이가 3장이나 되는 3층 단(壇)을 쌓게 하고 왼편에는 종을 걸고 바른편에는 북을 두고 맨 위에다 천자의 빈자리를 만들고 곁에는 반점을 베풀고 옥과 비단과 모든 기구를 갖추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 열국 제후들이 유숙할 수 있도록 여러 곳에다 관사를 지어 미리 예비하는데, 경치 좋은 곳을 골라 터를 다듬고 건물도 격식에 맞도록 지었다. 어느덧 약속한 날짜가 임박하자, 먼저 송환공 어설이 와서 자신의 군위를 정해 주기 위하여 이런 모임을 베풀어 준 데 대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음날은 진선공(陳宣公)과 주후 두 사람이 잇달아 당도했다. 채애공도 지난날 초나라에 잡혀가 죽을 뻔한 원한이 있기 때문에 달려와 참여했다.그런데 이들 4명의 제후들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창검이 없고 제나라의 병차가 보이지 않는지라 의아해 하다가 전후 사정을 알자 크게 감탄했다.
"제후(齊)는 오로지 예(禮)를 다해서 지극 정성으로 우리를 대하는구려."
그들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거느리고 온 군사와 병차들을 2O리 밖으로 물러가 있도록 했다. 이 때는 2월도 끝날 무렵이었다. 제환공이 초조하게 관중에게 상의했다.
"제후가 더 이상 모이지 않을 모양이오. 회합 기일을 연기하는 것이 어떠하오?"
관중이 대답했다.
"옛말에 세 사람이면 무리(群)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네 나라만 해도 결코 적은 수는 아닙니다. 만일 기일을 다음날로 연장하면 이는 믿음을 잃는 것입니다. 기다려도 모든 제후가 오지 않으면 이는 그들이 왕명을 욕(辱)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으로 4명의 제후가 모였는데 신용을 잃거나 또는 왕명을 욕되이 하고서야 장차 어찌 천하의 패권을 도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환공이 재차 물었다.
"이번에 동맹을 할 것인지 아니면 회만 하고 말 것인지 어느 것이 좋겠소?"
관중이 서슴지 않고 아뢰었다.
"비록 마음이 하나로 규합되진 못했으나 회(會)를 열어서 제후들끼리 서로의 마음이 흩어지지만 않으면 저절로 동맹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환공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3월 초하룻날 아침, 제 . 송 . 진 . 채 . 주 다섯 나라 제후는 함께 단 아래 모여 서서 상견례(相見體)를 했다. 제환공이 제후들에게 말했다.
"오늘날 왕정이 오래도록 피폐해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실정이오. 과인이 이번에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러분들을 청한 것은 장차 주왕실을 돕기 위함이니 앞으로 우리가 함께 일을 하려면 오늘 반드시 한 사람을 추대해서 모든 일을 주장케 해야만 권한과 의무도 생겨나고 또 왕실에 소속될 것이며, 따라서 정령(政令)도 천하에 펼 수 있소."
네 나라 제후가 서로 상의하니 한사람을 추대하는 데엔 별 반대가 없으나 난처한 문제가 있었다. 명확히 따져 보면 송나라는 벼슬이 상공의 자리에 있고, 제나라는 군후에 불과했던 것이다. 벼슬의 높낮이 순서로 따지면 송후를 추대해야지 제환공을 추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송나라 임금을 추대하자니 이번에 송의 군후가 새로 군위를 인정받은 것은 오로지 제환공의 노력과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둘 중에 누구를 주장으로 추대하느냐는 문제는 참으로 그 해결이 곤란했다. 이렇듯 난처한데 진선공이 일어나 말했다.
"이번에 주왕께서 여러 군후를 규합하여 이렇듯 회합하라는 뜻을 제환공에게 내리셨소. 그러니 누가 감히 제환공을 대신하여 주장으로 설 수 있으리오. 마땅히 제환공을 추대해서 맹회(業會)를 이끌도록 합시다."
다른 제후들이 이 말에 응낙했다.
"그 말이 옳소. 이렇듯 큰일을 다른 이가 감당하기는 정말로 어려울 것이오."
이에 제환공은 거듭 사양한 뒤에야 단 위에 올라가서 맹주가 되었다. 그 다음은 송, 그 다음은 진, 그 다음에 채, 그 다음에 주가 차례로 섰다. 이렇듯 차례가 정해지자 종과 북을 치고, 먼저 단 중앙에 마련한 천자의 빈자리를 향해 일제히 행례(行禮)하고 서로 친선 우호한 후 형제의 정을 나눴다.
2. 어찌 한 줌의 토지를 아끼리오
송나라 어설의 변심
이어 중손추가 꿇어앉아서 함을 열고 서찰을 꺼내 읽었다.
신왕(新王) 원년(元年) 삼월(三月) 초하루(一日)에 제나라 소백(小白), 송나라 어설(御說), 진나라 저구(杵舊), 채나라 헌무(獻舞), 주나라 극(克)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북행 땅에 모여서 함께 왕실을 돕고 약한 자를 원조하기로 맹세하노라. 만일에 이 맹약을 어기는 자 있으면 열국(列國)은 함께 그를 징벌하리라.
다섯 제후는 읍하고 명을 받았다. 그런 후에 서로 술잔을 들어 축원했다. 관중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말했다.
"노(魯) . 위(衛) . 정(鄭) . 조(曺) 나라가 왕명을 어기고 이 맹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왕명을 어긴 그들을 토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환공이 즉시 네 나라 군후에게 청했다.
"과인의 나라는 병차가 넉넉하지 못하니 모든 군후가 함께 거사합시다."
진 . 채 . 주 나라 군후가 일제히 대답했다.
"서로 힘을 다해 도우리다."
그러나 송환공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날 밤이었다. 송환공은 관사로 돌아가서 대부 대숙피와 의논했다.
"이제 보니 제후(齊侯)가 건방지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높혀 벼슬의 차례를 무시하고서 이번 맹회에 주장이 되었다. 어찌 아니꼬운 일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여러 나라 군사를 이용하여 자기 제나라를 높이려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도다. 장차 우리 송나라가 그들의 명령만 순종하다가 아무 일도 못하지 않겠느냐."
대숙피가 대답했다.
"이번에 안 온 나라만도 열국 제후 중에서 반이나 됩니다. 제후가 패업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나라가 노나라와 정나라를 굴복시키면 패업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번에 네 나라가 제나라에 모였으나 그 중에 제일 큰 우리 송나라가 순종하지 않고, 노나라가 또한 그들에게 대항하면 세 나라도 자연 해체되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곳에 온 목적은 왕명을 받들어 주공의 군위를 인정받고 결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바에야 여기에 남아 무엇을 다시 기다리겠습니까."
송환공은 머리를 끄덕였다. 드디어 송환공과 대숙피는 인사도 없이 새벽에 수레를 타고서 송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제환공은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 송환공이 회합을 배반하고 달아났다는 보고를 듣자 대로했다.
"그 놈을 잡아오너라!"
추상같이 중손추에게 분부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관중이 말했다.
"지금 그들의 뒤를 쫓는 건 옳지 못합니다. 군사를 일으킬 때는 언제나 왕군의 명목으로써 쳐야만 대의 명분이 섭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제환공이 물었다.
"무슨 일이 이보다 더 급하단 말이오?"
관중이 아뢰었다.
"송나라는 멀고 노나라는 가까이 있습니다. 먼저 이번 맹회에 참석하지 않은 노나라를 꺾지 못하면 송나라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제환공이 물었다.
"노나라를 치려면 어느 길을 취해야 하오?"
"제의 동북쪽에 수(遂)라는 나라가 있는데 노나라의 속국입니다. 우리가 중병(重兵)으로써 치면 수는 왕의 명령을 받은 우리 앞에 곧 항복할 것입니다. 수가 항복하면 노는 반드시 우리를 크게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 때에 사신을 노나라로 보내어 이번 북행 땅 맹회에 안 온 것을 준열히 꾸짖으십시오. 그리고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노부인 문강(魯夫人 文姜)에게 편지하십시오. 문강께서는 노후와 친정인 우리 나라가 서로 친하기를 원하느니만큼 적극 협조할 것입니다. 노후가 안으로는 노부인의 성화를 받고, 밖으로는 우리 군사의 위세에 눌리게 되면 반드시 우호 맺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노나라를 용서해 주고, 즉시 군사를 송나라로 돌려 송나라가 맹회 도중에 왕명을 가볍게 여긴 죄를 다스리는데 주공께서 왕신(王臣)으로 임하시면 송후는 대항하지 못하고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 이것이 파죽지세(破竹之勢)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