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4장
보수적 전통주의자인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사람인가?
회상의 이야기는 역사를 기억으로 보여주지만 다른 이야기(말하자면 신화의 형식)는 역사를 의미로 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이야기 방식은 모두-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든지간에-그들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 회상의 이야기도 의미의 이야기도 모두 현재에로 귀결된다. 나아가서 의미와 회상은 전혀 뚜렷이 구별될 수 없다. 각각 서로 다른 것을 필요로하며, 서로 그 속에 융합되어 있다. 우리는 가금 참으로서의 역사와 허위로서의 신화를 구분하지만 사실 이런 구분의 (이유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은 우선 너무나 과민한 것이어서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 이야기가 회상 이야기보다 눈에 띄는 선명성이 있다고 보는한, 신화 이야기가 보다 의미 깊고 보다 지속적 타당성을 가지기 때문에 그런 구분이 통용된다. 왜냐하면 신화 이야기는 많은 의미를 준다. 즉 이것이 의미 그 자체인 것으로 통용되는 한, 적절한 신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소박하게 이해한 인생보다는 신화의 방식에서 더 중요한 의미가 드러난다. 이 <다른> 영역은 언제나 의미 있는 영역임은 물론 의미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 있는 이야기들은 전형적으로 이중적인 역사성을 지닌다. 첫째, 이야기의 형식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은 바로 (특정) 시간-요컨대 역사의 한 단락-안에서 의미 있게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들로서 나타나는 인생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둘째,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바와 같이, (실제 삶의 생생한 사건들과 구분되는) 이야기라는 <별개성> 또는 <초월성>은 전체 이야기를 먼 과거 또는 아주 먼 장소, 혹은 이 둘다에다 서러정하는 이야기 형식속에 이미 드러나 있다. 내가 의미 이야기(즉 신화)에 대립하여 명명한 회상 이야기(즉 역사)를 신종하는 현대 유럽 문명권의 사람에게는, 의미란 결국 암암리에 회상속으로 섞여 들고 만다. 즉 역사라는 것이 말하자면 그들의 신화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표면상 의미 이야기, 즉 신화들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상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근거하고 있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신화의 무대가 되는 그 해당 시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사건들이다.
의미를 주는 이야기가 먼 과거의 일로 설정될 때는, 일반적으로 그 이야기 자체는 역사적인 과거, 회상된 역사적 과거와 사실상 연관을 갖는, 그런 과거의 일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구성된 이야기나 계보는 일반적으로 실제의 역사적인 과거의 그(이야기 속의) <다른>(<옛날의>)과거를 연결시키고 있다. 비록 다른 영역(즉 이야기 세계)의 존재들이 실제 일어나는 인간 역사에 대비되는 그것들 자신의 역사-물론 인간들이 실제 눈을 뜨고 활동하는 동안 보통 눈에 띄지 않지만-를 계속하고 있음을 우리가 적지 않게 자주 발견하게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추상적 이론과 개념적 분석이 발명되었음에도 구하고, 아런 이야기를 사용하는 경향은 결코 서구 문명권에서는 사라진 적이 없었다. 우리(서구인들)는 역사적으로 참으로 빈번하게 다종 다양한 이론적 이데올로기나, 교설, 구호(<자유 언론>, <인권 보장> 등등)들의 노예였다. 아직도 우리는 (기억된 과거만을 유의미한 것으로 정리하는) 이른바 역사의 연구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 이야기, 정치적인 신화 창조, 상업성을 띤 <인물 만들기>나 <각종 표창>, 그리고 (통속적인) 드라마, 예술, 문학 등을 정말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사고와 감성의 제 양태로 보고 그것들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근거에서 예식의 이미지, 따라서 전통이라는 이미지를 통한 인간다움의 실현을 깨닫게 되었다. 공자가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 형식-즉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것은 아주 독특하게 적절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의 내용은 인생의 의미를 사색하는 모든 형태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마도 가장 의미를 불러일으키기 용이한 형식과 완벽하게 합치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런 방식의 이야기 형식이 <고풍스런> 사유 형식이지만, 그런 이야기 형식은 현대의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완전한 고대로의 순전한 복귀가 아니듯이, 공자에게 있어서도 고대로의 순전한 복귀가 아니었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과 (그의 자율적,능동적인) 능력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통찰에 근거를 둔 이념을 제시함에 있어서 신화적인 과거의 이야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공자의 사유 속에는 (의미를 산출해 내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라는) 형식적인 모습이 그의 (전통에 결정적 역할을 부여하는) 가르침의 내용과 혼융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자는 그의 이사의 내용이 되는 전통에 대한 깊은 존경과 충성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아주 적절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긔 공자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바로 그의 가르침을 서구인의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구해 내어, 그것을 모든 인류에 대한 적절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밝히는 일이 된다. 우리는 옛날 방식에의 <복귀>를 가르치는 사람(즉 공자)을 둘러싼 문화적 갈등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자의 서술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의 가르침은 진정으로 역사적이며 내적 일관성이 있고 단지 전적으로 적절한 전통의 소유(즉 전통에로의 완벽한 복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공자의 가르침이 주는 과제는 공자 자신이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사실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갈등 많은 현재를 인간답게 하고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을 얻어 낼 수 있도록 자신의 전통에서 (참신한) 영감을 찾아 내라는 것이었다. <옛 것을 되살리어 새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옛 것을 되살리려는 일>(온고)의 목적은 어쩌면 (문제 많은) 현실 속의 전통들에 대한 (진지하고도 철저한 근본적인 새로운 개혁책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전통을) 무책임하고 자기 편한대로 대충 취급하는 미봉책을 호도하려는 완곡 어법, 즉 위선이나 자기 합리화의 일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점을 확실하게 부인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옛것을 믿고 또 사랑한다> 즉 전통에 대한 해석은 인간의 과거에 대한 참된 사랑과 존경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 에수, 불타는 모두 그들의 전통에 대하여 진정으로 심오하게 그리고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전통을 되살린 사람들의 본보기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유학자들이나, 기독교들 그리고 불교도들은, 그들의 현재 목적에 영합하는 말씀이나 행위라면-그것이 무슨 맥락의 전통이든지간에-(그 전통의 생생한 현장적 의미 추구를 사상해 버리고 오직 상투화된 죽은 형식적) 전통만을 조금씩 조금씩 뽑아 쓰고만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질적인 전통 묵수의) 태도는 (불가피한 것이 아닌) 자명한 전통 오용인 것이다. 전통적인 형식이나 예식들에 대하여 아무리 그것들이 현재 상황에 부적절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혀 개의하지 않고 아주 완고하고 무비판적으로 묵수하려는 사람들은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이 세 사람의 위대한 전통 개혁자(즉 공자, 예수, 불타)들의 태도와 대비되어 비판을 받아야만 한다.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알려는 방법으로서의 꾸준한 온고의 태도는 결코 편협하고 답답한 이상이 아니다. 온고의 태도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다 적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유효 적절한 통찰의 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본능이나 조건에 따라 (물리적, 기게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지성적인 관습적 방식에 따라 (자율적, 능동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독특한 (자율적인) 능력과 존엄성을 갖는 것이다. (이 점은 바로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철학적 분석가들이 말하는 바이다) 철학적 분석가들이 관습이 지니는 지성적 측면의 관점에서 보자면, 삶의 여러 형태들은 (천재의 어떤 기발한 순발력에 의해)갑자기 한번에 고안됐거나 수용된 것이 아니다. 삶의 여러 형태들은 우선적으로 앞선 시대로부터 관습으로 전래된 언어와 실천의 방대한 체계를 각 시대마다 계승하여 생겨난 것이다. 오로지 전통적인 방식들을 철저하게 쫓아서 참되게 성장함으로써만이 우리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오직 되살림으로써만, 우리는 우리들 삶의 통합성과 방향성을 유지하게 된다. 똑같은 전통을 지님으로써 사람들은 서로 결합하게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사람이 되게끔 한다. 모든 전통의 포기는 인간들의 분열을 가져온다. 전통을 되살리려는 진정한 온고의 노력은 (분열되는) 인간들을 통합시킴에 있다.
인간 통합에 대한 이런 실제적 비젼은 단순히 정치적인 비젼만이 아니다. 비록 이러한 공자의 비젼이 기록된 역사에 있어서 가장 웅장하고 성공적인 정치적 비젼 중에 하나이자만, 그것은 철학적 비젼이요, 종교적 비젼이기까지도 하다. 공자의 비젼은 전승된 삶의 형태에 뿌리를 내린 공동체, 바로 그 공동체 안에서 생생하게 존재하는 신성스럽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나타내 준다. 우리의 현대 세게는 신기한 호기심, 광적인 변화나 위기에 대한 지향만이 너무나 지나치게 용인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의 세게에서 공자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비젼은 단지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일축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공자의 관점은 그것의 발생지였고, 그 후대에 지나치게 전통에 모든 근거를 두었던 중국에서 보다도, 오히려 오늘의 우리(서양) 세게에 보다더 적합하고, 보다더 시의 적절하며, 버다더 시급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공자의 비젼이 지닌 진리를 깊이 통찰해 볼 필요가 있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 우리 시대에는 너무나 생소하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 참뜻에 무지한 것은 너무나 먼 시대적인 이질감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