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4장
보수적 전통주의자인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사람인가?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노나라의 예 역시 본질적으로는 (다른 변방 지역의 관습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특정 생활 방식의 총체인 것이요, 따라서 당시 세계의 여러 실제적인 도전들을 해결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증성을, 그렇다면 공자는 어떻게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논어>에서 이런 문제를 꼭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더 말할 나위 없이 공자는 상고 시대에 완벽했던 원래의 예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도덕적, 정치적으로 타락한 결과 이런 혼란이 야기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가 제기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왜 이런 식의 대답이 그 어떤 다른 대안적인 문제 제기를 아예 차단해 버릴 수 있을 만큼 (공자에게는) 그렇게 강한 구속력을 가질 수 있었던가? 당시의 일상적 삶에서 분명하게 도출될 수 있는 적어도 (공자가 제시한 대답과) 같은 수준의, 아니 (우리 현대인들의 눈에는) 그것보다 훨씬더 강한 설득력이 있을 수 있는 다른 여러 가지 대안의 가능성을 제쳐두고, 어ㄷ게 해서 공자는 오직 이러한 대답에만 도달할 수 있었던가? 우리가 이것을 (공자라는 개인의) 한정된 사고력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위대한 사상가요, 교육자인 공자가 핵심적으로 생각했던 문제들의 구성이나 대답의 방식안에 있을 수 있는 그 어떤, 보다 설득력과 보편성이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 하는 점을 적어도 이제 우리는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근거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공자를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자의 가르침을 단지 당대의 시대작 위기의 본질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하여 아무런 창의력을 제시하지 못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갈등과 혼란에 새로운 비젼을 제시했던 창의적인 대안으로 보아야만 한다. 앞으로의 서술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제시하지 않고 오직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얘기를 새롭게, 내가 희망하는 바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정말 계발적인 방식으로 주장해 보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공자를 단순히 과거의 제도와 문화의 현상 유지만 고집스럽게 변호하는 고풍스런 사람이라기보다는 위대한 문화 개혁가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앞의 어딘가에서 공자가 예의 기존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고 지적했듯이, 공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개념 전체를 변혁시켰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는 새로운 이상의 창조자이지 결코 낡은 이상의 변호인은 아니었다. 우리는 잠시 그를 새로운 이상의 제안자로 보기로 하자. 적어도 무엇보다 먼저 공자의 안목이나 그가 구사한 상투어의 표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갖는 역사적 역할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고대에 있었던 조화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지니는 실제적인 의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대 중국에서의) 지역적 전통을 다시 해석해 보고 이를 재창조할 수 있는, 새롭고도 보편적인 질서를 산출해 내려는 데 있었다고 하겠다.
공자가 그 당대의 역사적 사실에서 파악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인 접촉 관게를 통해서 (과거 변방과 중심의 제후국들간의 문화적 이질성이 사라지고, 점차) 새로운 유사성의 출현, 말하자면 일찍이 노나라를 포함한 좁은 지역에만 한정되었던 가치 개념들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는 새로운 공유의 현상이 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는 문학, 음악, 법률, 정치의 여러 형식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확대 공유되는 현상이 출현하는 것을 보았다. 역사적 증거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을 판단해 보면, 과거에 위대했던 문명의 퇴화가 아니라 새롭고도 보편성을 지닌 문명으로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그 당시에 막대한 인구의 급증이 있었다. 그리고 생산 기술과 교통 수단의 확대에 있어서도 일대 약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지역적으로 고립되고, 상이한 문화를 가졌던 다수의 민족들이 이제는 보다 더 긴밀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관념, 생활 양식, 관습, 언어의 교류와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공자는 (당대의 시대적 전환을) 퇴화의 과정으로 보고 당대의 혼란을 세쇠도미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실상 낡고 소규모적이며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보다 원시적이고 촌스러운 여러 집단들이 이제 새로운, 좀더 거대한 단일 사회로 통합되는 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부수되어 나오는 혼란과 무질서였던 것이다. 과거에 많건 적건 서로 고립되어 이질적이었던 (변방의 반 야만적) 사회들, 그렇지만 (당시의 사회적 대변혁 덕분에 비로소 문화 수준이 높은, 중심의 노나라와 더불어) 거대한 하나의 지정학적 공동체로 성장하는, 면적도 넓고 인구도 많은 (변방 지역들의 저급) 문화들에 대하여, 이제 공자가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몇몇 제후국의 (고급스런 중심) 문화의 지배에 주목했다는 사실은 정말 너무나도 자연스런 것이라고 하겠다. 면적이 적은 노나라의 상대벅으로 약한 국력을 감안할 때, 노나라 사람 공자가 (사회적) 질서와 통합을 위한 일차적 근거로서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문화적 정복에 눈을 돌린 것은 오히려 당연한 책략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공자는 주변의 강대한 제후국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많은 갈등들을 둘러보았고, 동시에 또한 그들 사이에서 노나라 지역의 고급 문화에서 연원하는 (새로운) 문화 수용의 징후들을 보았음을 우리응 상정하지 ㅇ을 수 없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공자가 모든 민족들이 이제 하나의 단일한 인간적인 실천과 이상의 체계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들 모두가 단합하여 천하가 태평성대할 수 있는 가능성-즉 하나의 이상-을 보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마침내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새로운 사회의 기본 구조로 노나라 문화의 수용이라는, 이미 명백히 드러난 경향을 더욱 자극하고 극대화하는 정력적인 계도 작업을 통해서야만 그러한 이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고 생각된다.
공자의 비젼은, 사실 다른 어느 것보다도 중국이 실제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참된 것이었다. 그것은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중심 지역의 통일된 문자, 언어와 여러 예식 형태들로부터 전체적으로 영감을 받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 조직에 기초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통합 문화의 출현에 대한 비젼이었다. 당시의 정황속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이상이 어떻게 정립되어 설득력 있게 설파될 수 있었던가? 당장 드러나는 것은 불가사의한 역설뿐이다. (당대의 사회적 대전환이라는 와중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이상이란 바로 누구나 다같이 동일한 이념과 실천의 체계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거대한 사회에 대한 이상이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이 자기들 관습대로 각기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다양한 방식들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런 방식들은 어떻게 생겨 났고, 어떻게 정당성을 획득했으며, 유지되어 왔는가?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기본적으로 이중적이다. 첫째는 전통에 대한 강조이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다양한 인습적 행위들이 확립되는 데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효력 있는 명령, 공동의 합의, 그리고 수용된 전통의 계승이 그것들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공자에 의하여 그 중요성이 암묵적으로 인정된 것들이다. 진실한 왕이 길을 선도하고, 백성들이 동의하여 자발적으로 따르는, 즉 가르쳐지고 따르게 되는 것이 곧 전통이며 이는 선인들의 생활 방식이다. 전통의 내용이 하늘의 의지 즉 <명령>의 다른 형식)라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그 전통은 곧 선인들의 도와 일치한다. 왜냐하면 하늘의 의지는 멋대로 (새롭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공자는 역시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 선인의 도, 즉 전통에 첫째가는 우위성을 인정하였다. 왜 공자는 궁극적으로 전통을 일차적으로 강조해야만 했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몇 가지 중요하지만, 부차적 이유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은 (남의 가르침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결코 남들을 지도하지는 못한다. 이 점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히 지식과 문화가 결여되어 있고, 타인들에게 바람직하게 행동할 것을 계도할 수 있는 아무런 전통도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공동의 합의는 배경적인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그 당대의 통치자들은 흔히 전제주의적이었고 권력 추구에 매몰되어 있었음이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선한 통치지가 필요했으며, 그래서 그런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하기 위해서 통치자는 선에 대한 비인격적인(객관적인) 기준을 가져야만 했다. 비인격적안 가준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전통이나 천명이었다.
공자가 <논어>에서 천에 대하여 언급하기는 했으나 그 역할은 분명하지도 않고 그다지 정교하고 치밀하게 논의된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공자 철학의 결정적 영향력은 그의 정치에 대한 통찰에 있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통찰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그는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신학>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현세에서의 인간의 삶에 보다 깊은 관심을 쏟았다. 공자의 가장 내용적인 철학적 통찰의 하나는 바로 사람의 인간성은 예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동물이나 무생물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관습을 잘 배워서 실천하는 일 때문이라고 보았다. 폭력, 협박, 명령에 의한 (강제적, 수동적 행위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잘 배워 익힌 관습의 실천 속에는 얼마나 신비스러우며 얼마나 인간적인 (즉 자발적 능동적인) 힘이 깃들어 있는가를 공자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공자는 인간만이 지니는 존엄성과 관련된 힘이 신성한 의식이나 예식들과의 관계에서 특정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예식은 행위 자체 안에 생리적인 조화와 아름다움과 신성함이 강조되는 관습화된 실천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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