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치성 교외에 도착하자 포숙아는 소백을 일단 성 밖에 있게 하고 홀로 수레를 달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대부들을 일일이 찾아 뵙고 공자 소백이 어질고 덕 있음을 강조했다. 대부 습붕이 귀뜸했다.
"이번 일은 옹름이 주관했소이다. 그의 지지를 받는 일이 무엇보다 급하오."
포숙아는 옹름의 부중으로 갔다. 그곳에는 옹름의 입장을 따르는 여러 명의 대부들이 함께 있었다. 포숙아는 대부들에게 공손히 절하고 공자 소백을 여러 모로 떠받들었다. 옹름이 매우 난처해 하면서 물었다.
"장차 공자 규가 올 것이오. 그럼 우리는 그를 어찌 대접해야 하오?"
포숙아가 얼른 대답했다.
"이제 일 년도 채 안 되어 두 번씩이나 임금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이제 덕이 있고 인화있는 인물이 아니라면 이 어지러운 시국을 안정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산동의 대국인 우리 제나라는 이번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군위를 세우고 안정해야지, 인근의 다른 나라 도움을 받아서는 결코 안 되리라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공자 규는 노나라 임금이 이끄는 대군과 함께 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우리 제나라 군위에 공자 규를 앉힌다면 노장공은 반드시 보답을 요구할 것입니다. 자고로 남의 나라 군위를 세우는데 군대를 동원하여 힘으로 올려 앉혀 놓고 이를 크게 생색내면서 흔히 재물이나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어디 있었습니까. 노장공이 요구하는 재물이나 보옥(寶玉) 등의 재물쯤은 들어 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문강께서 또 우리 내정(內政)에 시시콜콜 간섭할 것입니다. 그 때는 여기에 계신 대부들께서 어찌 감당하시렵니까?"
포숙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대부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대부분의 얼굴빛이 밝지 못했다. 포숙아는 계속 말했다.
"또 공자 규보다 공자 소백께서 먼저 도성에 당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늘의 뜻입니다. 더구나 우리 공자 소백께서는 거나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거후가 노장공처럼 보답을 요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약간의 예물만 보내 주어도 거나라는 크게 기뻐하고, 오히려 우리 제나라를 형님의 나라처럼 믿고 따를 것입니다. 제 말에 어긋남이 있습니까?"
그제야 대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노장공의 뜻을 어떻게 거절해야 될지 그것이 걱정이 되는구려."
포숙아가 대답했다.
"우리 스스로에게 임금이 있으니 어찌 걱정하십니까? 그들이 스스로 물러나야지요." 그 때 대부 습붕과 동곽아 등이 당도했다. 그들은 집안으 로 들어오며 일제히 외쳤다.
"숙아의 말씀이 옳소. 우리 제나라 대부들이 어찌 작은 나 라 임금을 염려한단 말이오."
이래서 대세는 공자 소백에게로 결정이 되었다. 포숙아는 곧 소백을 성 안으로 모시고 들어와 모든 대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나라 군위를 정했다. 이 때 임금이 된 공자 소백이 바로 제환공(齊桓公)이다.
제 . 노 일차 전쟁
제환공이 궁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모든 걸 정돈한 후, 포숙아가 서둘러 말했다.
"이제 노군(魯軍)을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중손추(仲孫湫)가 노장공을 만나려고 떠났다. 그는 도중에 노장공과 공자 규의 일행과 마주쳤다. 중손추가 노장공 앞에 나아가 포숙아의 말을 전했다.
"저희 제나라에는 이미 새 임금이 즉위하여 군위가 세워졌습니다. 노나라 군후께서는 일단 멈추시고 저희 임금께 통지하셔서 양국 군후가 친선과 우호로 만나십시오."
노장공이 의아해서 물었다.
"허허 이상한 일이로다. 군위가 세워졌다니....... 도대체 제나라 임금이 될 자격이 누구에게 있다더냐? 하늘에서 공자가 새로 한 분 떨어져 내렸느냐?"
"공자 소백께서 군위에 오르셨습니다."
노장공은 그제서야 소백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노장공이 크게 화를 내며 부르짖었다.
"자고로 군위는 장자순이라 했다. 어찌 형님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를 제치고 동생이 임금이 된다 하더냐. 과인이 여기까지 왔는데 너의 그 말만을 듣고 그냥 물러설 성싶으냐. 그렇게는 절대로 안 된다. 어서 공자 규를 영접하여 새 군위에 모시거라."
중손추는 하는 수 없이 돌아가 제환공에게 노장공의 주장을 보고했다. 제환공이 포숙아에게 물었다.
"이를 어찌 하면 좋겠소?"
포숙아가 대답했다.
"노후가 그런 생각이라면 군사로 막아야지요."
포숙아는 왕자 성부로 우군(右軍)을 삼고 영월을 부장으로, 동곽아로 좌군(左軍)을 삼고 중손추를 부장으로, 옹름을 선봉으로 세우고, 스스로는 제환공을 모시고 중군(中軍)이 되었다. 그리고 병차 5백 승을 나누어 거느렸다. 동곽아가 청했다.
"노후가 병차를 이끌고 왔다 하지만 대개의 병사들이 가벼운 차림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우리 제나라 땅입니다. 따라서 노군(魯軍)은 성급히 공격해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형적으로 매복하기가 쉽지 않은 건시 땅에다 우리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회를 엿보아 기습적으로 공격하면 노군을 크게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포숙아가 대답했다.
"좋은 계책이오."
이리하여 영월과 중손추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려 건시 땅으로 가서 길을 나누어 매복했다. 한편 노장공은 도성을 향해 나아가다가 건시 땅 부근에 이르자 사방 지형이 확 트였고 매복하기 쉽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므로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그 곳에다 영채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관중이 앞으로 나서서 아뢰었다.
"소백은 이제 겨우 군위에 올랐기 때문에 아직 민심이 안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속히 진격하면 반드시 성 안에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기서 영채를 세우시면 하등 이득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노장공은 가뜩이나 화가 곤두서 있던 차에 비꼬여진 심사로 관중을 핀잔했다.
"그대의 보고 그대로를 따른다면 소백은 이미 황천길에 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대는 병법을 조금이라도 아는가? 여기를 보라. 산세(山勢)도 험하지 않고 사방이 확 트여 있어 포위당할 염려도 없으니 영채를 세우기에 마땅한 자리 아니 겠느냐."
관중은 더 이상 할말을 잊었다. 공자 규가 슬며시 관중에게 물었다.
"우리도 여기다 영채를 세우는 게 좋겠소?"
관중은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뒤쪽에 멀리 떨어져 세우는 게 좋습니다."
드디어 뒤쪽 십여 리 떨어진 곳에 공자 규의 영채가 세워졌다. 관중은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었다. 한편 영채를 세우고 나서 노장공은 척후병을 내보내 제나 라 쪽의 동정을 파악하도록 했다. 얼마 후,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했다.
"제군이 이 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노장공이 보고를 받자, 주위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를 내어 말했다.
"내 먼저 제군(齊軍)을 무찔러 우리 노나라의 무용(武勇)을 만천하에 크게 보이리라."
노장공은 진자와 양자 두 장수를 거느리고 병차의 앞장을 서서 제나라 군대 쪽으로 쳐들어갔다. 제나라 군대의 선봉은 옹름이었다. 노장공은 옹름을 보자 크게 꾸짖었다.
"네 스스로 도적 무지를 죽이고 우리 노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공자 규를 임금으로 모셔 가겠다고까지 하고서 이제 그 입술에 바른 침도 마르기 전에 변심을 하다니....... 도대체 네 놈의 신의는 어데 있느냐?"
옹름은 이 말을 듣자 부끄러운 기색으로 머리를 얼싸안고 쥐구멍을 찾듯이 달아났다.
"저 놈을 잡아라!"
노장공은 즉시 진자와 양자 두 장수에게 명하여 옹름을 뒤쫓게 했다. 진자와 양자는 좌우로 나누어 도망치는 옹름을 맹렬히 추격했다. 얼마쯤 달아나던 옹름은 문득 돌아서서 뒤쫓아오는 진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양자가 합세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또 달아났다. 이에 노나라 군사들은 신바람이 나서 젖먹던 힘까지 다 기울여 옹름을 뒤쫓아갔다. 이런 속에서 포숙아는 보이지 않게 노나라 병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드디어 노나라의 병차들은 제나라 포위망에 갇히는 꼴이 되었다. 결국 양자는 병사들에게 사로 잡히는 포로 신세가 되고 진자는 몸에 화살까지 맞고 죽을 힘을 다하여 겨우 포위에서 벗어나 죽자살자 달아났다. 한편 노나라 대장 조말(曹沫)은 노장공이 혹 실수라도 할까 염려하여 영채와 노장공 사이를 오가며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좌우에서 포성이 일어나며 지금까지 매복해 있던 제나라의 장수 영월과 중손추가 군사를 휘몰아 거느리고 덮쳐 오는 것이었다. 조말은 크게 놀랐다. 그래서 변변히 싸움 한번 못 해보고 군사 태반을 잃었다. 그 자신도 몸에 큰 부상을 입고 죽을 힘을 다하여 노장공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그가 막 노장공이 있는 중군 진지 근처에 왔을 때였다. 한 포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데 정면으로 포숙아가 제나라 중군을 이끌고 한일(一)자로 열을 벌이고 다가오고, 삼면에서도 제나라 군대가 포위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노후의 몸값, 1만 호
포숙아가 큰소리로 전령했다.
"노후(魯侯)를 사로잡는 자에게는 1만 호의 식읍(食邑)을 상으로 내주리라!"
이 말을 전하는 군사들의 소리가 사방에서 성난 파도처럼 번져나가 거대한 함성으로 변해 울려퍼졌다.
"노후를 잡아라! 1만 호 식읍이다!"
병사들은 모두 노장공을 향해 밀려들었다. 노장공은 기겁하여 앞뒤 안 보고 그대로 달아났다. 그런데 제나라 군사들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이었다. 노장공은 병졸의 옷을 빌려 입고서야 제나라 군대의 손길에서 벗어나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마침 포숙아가 후퇴하라는 금을 울렸다. 사방에서 노나라 패잔병을 쫓던 제나라 병사들이 그제서야 무기를 거두고 정연하게 대오를 갖추며 모여들었다. 각자 노획한 군기(軍旗)나 무기들을 갖다 바치는데 중손추는 노장공이 탔던 융노(戎路)를 빼앗아 바치고 영월은 무수한 포로까지 사로잡아 바쳤다. 제환공은 크게 기뻐하고 병사들을 위로한 후, 포로로 잡힌 노나라 장수 양자를 군전에서 참하여 적군에 대한 군율(軍津)을 엄정히 밝힌 후 먼저 도성으로 돌아갔다. 한편 관중은 노장공에게 크게 얕보인 후 영채 후미에서 진중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장공이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관중은 소홀과 부양에게 공자 규를 보호하면서 뒤채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적은 수효이지만 병차를 이끌고 노장공을 도우려 앞채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관중은 달려가던 도중에서 병졸로 변장하고 급히 도망쳐 오는 노장공과 서로 만났다. 그들은 군사를 합쳐 재편성하고 있는데 조말이 또한 패잔병을 이끌고 달려와 합세했다. 그래서 일단 재정비를 갖추고 점호해 보니 열 중 일곱은 이미 잃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