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3장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자리:인
사람은 인성의 다듬어지지 않은 원재료만을 가지고 태어남으로 인은 <먼저 어려운일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아직 깎이고 닦이지 않은 원재료, 즉 성숙한 인간으로 형성될 수 있으나 아직은 조야한 충동들이나 잠재력에 불과한 것이다. 짜임새 있는 인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은 예가 계발되는 한에서만 계발된다. 인은 예 안에서 자기 모습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사회 정치적인 관계와 문제들에 대해서 알게 되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들 문제에 대해 상당히 폭넓은 경험을 가질 때까지는, 요컨대 실제 정치에 참여해서 행정적인 일의 특정한 성격을 배울 때까지는, 그는 그의 군주에 대해서 심오하고 지적인 충성심을 가질 수 없다. 어린 아이의 단순 소박하고 미숙한 집착이나 의뢰심과 위대한 (경륜을 가진) 정치가의 깊고도 세련된 군주에 대한 충성심 사이의 간극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인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전자의 미숙한 단계로부터 후자의 성숙한 단계까지의) 틈새를 건너오는 동작이란 예를 배워서 달통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아무리 처음에 그것이 강렬했다 하더라도, 여러 번의 위기나 좋은 운수 그리고 틀에 박힌 일상 생활을 통한 수년간의 결혼 생활 뒤에 나타날 수 있는 상태와 비교해 보면, 내용면에서 상대적으로 무정형적이며 빈약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타인에 대한 각각의 개인적인 자세는 새로운 행위의 규범, 새로운 의무, 새로운 양보와 취득을 요구하는 일련의 상황을 겪지 않고서는 계발되고 심화되고 풍부해질 수 없다. 고통(고전적 의미에서)과 행위는 인간(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배울 때까지는 인은 실현될 수 없다. 인과 예는 동일한 존재의 다른 국면일 뿐이므로 그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성숙해질 수 없다.
인은 <어려운 일을 한 뒤에> 온다. 물론 예를 배우는 데는 시간과 노력,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인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안하지 않는 사람은 예와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자신을 예에 귀의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인하다. 이렇게 인과 예는 상호적으로 작용한다. 인은 당장이라도 실현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예 대한 대답은 좀더 복잡하며 또한 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는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몸짓, 즉 시간과 공간을 통한 일련의 동작들을 강조한다. 이러한 몸 동작은 여러 단락들, 즉 일련의-각각의 단계가 그 다음 단계에 필수적인-그런 단계들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를 수행하는 방법(즉 일련의 단계들)이 있지만, 인은 그렇지 않다. 행위자의 관점에서 자기 몸짓을 보자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로 따로따로 분석될 수 있는 복잡한 행위 패턴이 아니라 <단순한> 몸짓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행위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자기 행위를 본다는 것은, 외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서 그 대신 오로지 내심의 신비스런 영역을 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행위를 공개적으로 노출된 행위로만 규정하려는 범주들의 맥락으로 규정 지으려는 것이다. 이 경우 이것이 당장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사할 것을 결정하고 그렇게 한다.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예이다. 어떤 특정 맥락에서 우리는 공개적으로 드러난 연속된 몸 동작-즉 복잡한 일련의 손과 팔로 움직임, 규정된 인사말과 교환, 요컨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행위적 요소와 언어적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일련의 잘 조화된 행위들과 수행-을 보는 것이다. 그런나 누구에게 인사하기로 결정하는 일은, 또한 몇 단계의 정신적 행위로 반드시 나눠질 수 있는 <정신적>행위, 즉 또 다른 <내심의> 행위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내재적, 본질적인 길 또는 방법은 없다. 사람은 간단히 결정한다. 물론 결정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는 있다. 즉 우리의 숙고는 시간을 끌 수도 있다. 때에 따라 우리의 결정에 도움울 주기 위해 한두 가지 손쉬운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이런 것은 어떤 것도 결정을 내리는 데 본질적이지 못하다. 즉 이런 (마음 속의) 결정은 결코, 남의 손을 잡고 흔드는 행위가 그 인사행위에서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되는 그런 식으로 결정을 내리는 데 구성적인 요소가 되지 못한다. 숙고가 이전과는 다른 (심리사의) 경로를 취했다고 해도 우리는 (인사라는) 똑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논지의 요점이다. 그러나 바로 똑같은 (일련의 행위의) 단계를 밟지 않고서는 똑같은 인사를 할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일련의 행위의) 단계들이 실제의 인사 행위를 구성한다. 그러나 (인사하려는 마음의) 결정을 구성해 주는 (일련의 심적인) 단계들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시공적으로 어떤 단계도 없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결정 행위의 기적적이고 마술적인 성격의 증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공자가 의도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아니면 <결정하는 일>(<인하기로 결정하는 일>)을 어떤 심비한 내심의, 개인적인 <정신적>영역에서-아마도 그곳에는, 우리 서구인들이 특히 데카르트 이래로 자주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기계>, <구조틀> 또는 <대행자>가 있으리라고 상정되는 영역에서-발생하는 어떤 과정이나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마음의) 결정>과 <(실제의) 인사>라는 그런 행동들 사이의 이런 유형의 대조를 그 개념들이 수행하는 <논리적> 역할에서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는 이득을 보았다>라는 말이 그 사람이 실제 사고 파는 눈에 보이는 행동과 명백하게 구별되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행위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존에게 인사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말 또한 내적인 심리 영역의 신비적인 행위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익을 본다>는 문장과 <결정을 한다>는 문장이 일련의 공간적이고 구체적인 행위, 그 자체의 국면들을 지적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정하거나 이익을 만드는 그런 행위를 구성해 주는 일련의 <단계적>행위를 우리가 (이들 어구만으로는) 묘사하거나 결코 보여줄 수는 없다는 사실은 그 어떤 형이상학적 신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들 어휘는) <문법적>인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시에든 아니면 위에서 말한 일종의 언어 분석에 호소함에 의해서든, 우리가 서구의 전퉁적인 정신적 편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과 그와 관련된 개념들에 대한 공자의 의도를 보다 더 자유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현대의 철학적 분석을 그가 가르치거나 사용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처신에 대한 정신적 해석 또한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그가 배제했다거나 반대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가 정식화한 것은-정신적인 개념이나 모형에 대해서는 무언의 언급 또는 암시조차도 없는-공자 그에게만 특유한, 그 자신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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