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3장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자리:인
우리는 다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적어도 일단 이런 복잡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군자는 <자기가 말한 것을 우선 실행한 뒤에 그 다음을 이어가는 것이다> 인 자체, 즉 그것이 적극적인 특성, 그 용어의 정의, 아니면 적어도 인한 사람의 몇몇 결정적인 특징에 관해서 우리가 공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까? 몇몇 단서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 단서 중 가장 명확한 것들은 십중팔구 공자 자신의 언급 중에서 후기에 속하는 것이요, 어느 경우에는 정말 공자의 말씀으로 보기에는 불확실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논어> 중에 후대에 작성된 부분에서 인한 사람의 특성으로 묘사된 좀 상투적인 몇몇 덕목들에 대해서는 가볍게 넘어가려고 한다. <공손한>, <부지런한>, <충성스러운>, <용감한>, <너그러운>, <친절한> 등등의 표현들은 우리에게 어떤 통찰이나 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전통적인 덕목들이다. 더우기 이들 후대의 언명들, 특히의 경우에 대한 진위 문제를 접어 둔다 해도, 앞에서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것처럼, 공자가 여러 번 그러한 덕을 소유하는 것이 인한 사람이 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위에서 열거된) 그런 덕목들은 결정적인 것이 못된다.
일련의 언명들 중에는 인의 특성을 매우 뚜렷하게 드러내 주지못하고, 매우 의심스러운 언명이 있는데, 그런 부류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옹야>의 언명이라고 하겠다. 웨일리가 지적했듯이, <논어> 원문의 후반부는 도가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으며 아마도 혼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인한 사람은 인함에 만족하는 반면, 앎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인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또한 인한 사람은 조용하며 장수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인 자체의 특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규정해 주고 또한 (그것의 이해에) 가장 많은 도움이 되는 언명들에 주목해 보기로 보자.
자신이 입신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입신시키도록 하라. 나아가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나아가게 하라. 자기에게 가까운 것으로부터 유비를 얻는 것 (즉 이웃을 자신처럼 여기는 것) 여기에 인의 길이 있다.
자신을 극복하여 예에 귀의하는 사람은 인하다.
앞의 두 언명에서 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밀접히 연결된다. 첫 번째 예문에서는 사람 사이의 일반적인 상호 신뢰에 구체적인 내용이 부여된다. 그것은 예에 의해 상세히 규정되는 구체적 사회 관계의 틀이다. 요컨대 예 속에 정의되어 있는 특정한 형식들을 통해서 상호간의 신뢰와 존중이 표현되는 곳에 인의 길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와 인은 같은 것의 양면인 것이다. 각각은 인간을 뚜렷하게 인간답게 만드는 역할에 이바지하는 인간 행위의 (각각) 한 측면을 지시하고 있다. 예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행위나 관계들에 대한 전통적인 사회적 패턴에 주의를 돌리게 한는 것이며, 인은 그런 행위의 패턴을 추구함으로써 그러한 관계들을 유지하고 있는 그런 사람에게 주목을 하게 한다. 예는 불변하는 규범을 예증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신분에 맞는 특정한 행위를 지시하며, 인은 인간됨의 방향성을 분명히 나타내는, 즉 예의 규정대로 행위하겠다는 그 사람의 심지를 명백하게 표현하는 행위와 연관된다. 예는 한 행위자의 단일하고 개별적인 몸짓, 즉 그런 몸짓을 하는 오직 그 한 개인과 그런 특수 행위가 늘어나는 오직 그 하나의 앞뒤 맥락과 연관하여 그 사람 자신이 특정적, 개별적으로 하고 있는 몸짓과 연관되는 것이다.
(이런 공자 철학의 중요한 개념들이) 우리 (서양인)들에게 좀더 친근한 서양의 용어로 표현될 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 (서양인)들은, 내가 앞서 설명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은 바로 마음의 태도, 감정, 소망, 의지와 연관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런 식의 (번역) 용어들은 오해를 야기시킬 수 있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용어를 (개개인의) 심리적 차원의 문제로 보는 일이다. (공자의 이런 핵심적 개념을 전혀 개인의 심리상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새로운 시각에서) 이런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첫번째 단계는 인 및 그와 관련된 다른 <덕목>들, 그리고 예라는 것 등은, <논어> 원문에서 <의지>, <감정>, <내심의 상태>라는 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일이다. 어느 한 사람과 연관된다는 <그런 이유 때문에> 인을 바로 그 사람의 내적 심리 또는 정신적 상태 또는 그 진행 과정을 지시하는 인으로 치환하는 것에 대비될 만한 것을 <논어>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확실히 그러한 연관 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나 또는 비체계적으로나 전혀 공들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위의 논지에 대해 유일하게 명백한 예외는 <자한>, 9:28과 그것이 반복된 <헌문>, 14:30에서 볼 수 있다. 두 구절에서 인한 사람은 우(불행한, 근심스러운, 걱정스러운)하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그 문장의 앞뒤 맥락은 이것이 (인에) 우연하게 부수되는 속성이 아니고 오히려 (인의) 특성을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명백히 내적이고 주관적인 언급때문에, 그리고 여기에서 인에 대한 핵심적인 어떤 의미가 다루어지고 있다고 시사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중요한 문장들과 우라는 용어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두 문장의 내부 구조는 평범한 음운상의 대구를 이루고 있다. 세가지 중심 미덕(지, 인, 용)이 언급되고 있고, 똑같은 문법적 구조 형식으로 가가의 덕목이 부정적인 단일 어구로 규정되어 있다. 지자는 당혹해 하지 않고, 용자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인자는 우하지 않는다, 거의 동어 반복적인 성격의 앞의 두 구절은 거의 같은 방법으로 <인한 사람은 우하지 않는다>를 받아들여야 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는 인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추정해 보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의 의미를 더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일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그것은 이 논의의 주제에 대한 더 깊은 이해-그리고 확증-을 제시해 줄 것이다.
우가 쓰여 있는 <논어>의 다른 문장을 보면 어떤 문장은 번역하는 사람마다 번역이 다르고 또 같은 번역자라도 문장마다 다르게 번역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레그는 <슬픔>으로 번역했는가 하면, 웨일리는 <걱정>으로, 레슬리는 불어의 <희한하다>와 <당혹함>으로 번역했다. 또 <술이>, 7:18에서는 <슬픔>으로, <비통>으로, <근심>으로, <고뇌>로 되었다. 그러한 유형은 게속 반복된다. 분명히 번역자들은 완전히 일치를 볼 수 없는 한문 용어에 대해 적절하고 특정한 유럽의 용어를 무엇으로 정할까 고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용례들 중에 공통 분모가 있는지를 보면, 모든 용례에서 우는 골치 아픈 상태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골치 아픔>이라는 말은 마음이 <불안정하고>, <평정하지 않으며>, <혼란스러운> 의미를 내포허며 따라서 <우선 먼저 불길하고 불쾌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함축된다. <슬픔>, <근심>, <비통>과 같은 번역들에는 사람 개개인의 주관적 심리 상태, 격정과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에 강조를 두는 것이다. 서양인에게는 이런 식으로 볼 때 의미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따라서 인한 사람이 대체로 우하지 않은 사람에 상응한다면 인은 우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인이란 하나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심리적인 용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우가 사용되는 문맥을 따라, <논어>의 원문을 검토해 보면 우리는 다른 그림을 얻게 된다. <위정>,2:6에는 부모가 자식의 병에 대해서 우한다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불길한 걱정거리, 즉 일정 상황에서의 객관적인 불안감과 연관되어 특정지어진 부모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말하자면 부모들의 (객괸적인) 걱정거리에 대한 대응은 걱정스러운 (객관적 사실적인) 대응인 것이다. 서양인들은 이런 대응의 <걱정거리>를 아주 쉽고도 자연스럽게 <내적인> 심리 상태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이 억지로라도 이 <논어>의 원문을 직접 보고 나서, 적어도 이 구절에는 심리적으로 내적인 도는 주관적인 어떠한 뜻을 풍기는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이의 병은 (객관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요, 부모의 걱정이 담긴 대응 또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라고, 우리는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문 텍스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무언으로 전제하고 있는 상념이 바로 부모의 걱정된 모습이야말로 걱정스런 '내심의' 상태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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