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서 공자 규와 관중, 소홀, 부양 등은 곧바로 간단한 행장을 갖추고 몰래 임치성을 빠져나가서 서쪽 노나라로 달렸다. 원래 노나라는 공자 규의 외가이고, 부양도 그 곳 사람이 아닌가. 또 제양공과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는 나라다. 그래서 관중은 지난번에도 슬쩍 가서 여러모로 살피고 돌아온 것이었다. 노장공은 공자 규를 정중히 맞이했다. 그리고 생두 땅에다 거처를 마련해 주고 의식과 재물을 풍성히 주었다. 한편, 군위에 오른 무지는 그 동안 천대받아 온 화풀이라도 하듯이 이곳저곳에서 부딪치고, 마구 제도를 고친다고 호령해대니 별로 좋아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연칭은 모든 대부를 마치 자신의 종복 거느리 듯 거만스럽게 대했다. 대부들은 연칭을 아니꼽게 생각했다. 관지부는 그런대로 성실했다. 그러나 부장(副將) 출신으로 하루 아침에 아경 벼슬에 오르니 그의 벼락 출세를 뒷받침해 줄 만한 심복 부하가 변변히 없었다. 인재를 구한다는 방을 내걸어 보았지만 별로 성과가 없었다. 우선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관중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몇몇 소문 난 인물들에게 초청하는 사람을 보냈지만 응하는 이조차 몇 명 안 되었다. 이렇듯 무지와 그 일당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자 어제까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던 자들까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정치적 설득력과 장악력이 뛰어난 대부 옹름은 벌써부터 반심(反心)을 품고 있었다. 조회 시간이었다. 그는 슬며시 다른 대부들의 마음을 흔들어 보았다.
"요즘 노나라에서 온 사람들 말을 듣건대 노장공이 우리 공자 규를 도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올 것이라 합디다. 혹 그런 소문을 듣지 못하셨는지요?"
대부들이 대답했다.
"그런 소문이 있습니까?"
그 이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옹름은 대부들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무지를 지지하거나 그에게 충성하는 대부였다면, 곧바로 무지에게 소문을 아뢰고 빨리 군사를 보내 철통같은 경비를 하자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소문의 진위를 따지고 들 텐데 그런 대부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속으로는 모든 대부들이 무지를 좋아하지 않는구나.'옹름은 확신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몇 사람의 대부들이 옹름의 부중으로 찾아왔다. 그 중의 한 대부가 옹름에게 물었다.
"공자 규가 노나라의 지원을 받아 쳐들어올 것이라는데 그 소문이 참말인가요?"
옹름이 그들의 묻는 의도를 눈치채고 은근히 되물었다.
"만일 그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소?"
동곽아가 대답했다.
"선군은 비록 음탕 무도하였지만 그 동생되시는 분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우리는 공자 규나 공자 소백께서 어서 귀국하시기를 고대하오."
습붕이 또한 말했다.
"지금의 임금은 적통(適統)이 결코 아니오. 나는 지금 외국으로 나가 있는 공자 규나 공자 소백 두 분 가운데서 어느 공자이더라도 한시라도 빨리 돌아와 지금의 임금 무지를 내 친다면 그 사람을 받들어 주공으로 모시겠소."
습붕은 예전부터 공자 소백을 좋아했다. 야무진 성품으로 매사에 맺고 끊음이 확실하여 습붕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소백이 세자라면 좋겠다.' 더구나 이렇게 어수선한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그의 당찬 성품으로 보아 적격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공자 소백을 들먹였던 것이다.
옹름의 계책
옹름은 자신이 생겼다. 비분 강개한 목소리로 대부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무지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절대로 진심에서 나온 게 아니오. 나는 장차 임금을 죽인 도적을 징계하고 우리 제나라 궁중의 법통을 바로잡으려 꾹 참고 있는 것이오. 모든 대부들께서 저를 도와 주시겠소?"
습붕이 물었다.
"옹대부께서 좋은 계책을 이미 세우고 계신 듯한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옹름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금 고혜로 말할 것 같으면 연칭과 관지부 등도 존경하는, 명실공히 이 나라의 어른이오. 그 고혜께서 부른다면 연칭이나 관지부는 버선발로 달려갈 것이오. 나는 고혜에게 부탁하여 연칭과 관지부를 부르게 하겠소. 그리하여 무지와 그 들을 떼어 놓은 후, 무지를 찔러 죽이고 불을 놓아 신호해서 연칭과 관지부도마저 해치운다면 바로 일에 성공하는 게 아 니겠소."
습붕이 다시 물었다.
"우리들 모두 무지와 그 일당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 같소이다. 나 역시 그렇소. 반드시 무지 일당을 해치우는 데 힘을 아끼지 않을 결심이오. 요는 무지를 해치우고 나면 우리가 모두 합심하여 누구를 새 임금으로 모시고 받들 것이냐 하는 것이오. 이 문제를 옹대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옹름이 대답했다.
"공자가 두 분이 계시는데....... 연장자로 한다면 노나라에 가 있는 공자 규가 되어야 할 것이고, 한편으로 거나라에 가 있는 공자 소백을 모시자는 의견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니 우선 도적부터 해치우고 논의하면 어떻겠소이까."
이렇게 하여 모인 대부들은 일단 힘을 모아 무지와 그 일당을 해치우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옹름은 각자의 역할을 정한 뒤 고혜의 집으로 떠났고, 동곽아는 연칭과 관지부의 부중으로 갔다. 습붕은 가신 중에서 날랜 자들을 뽑아 무장을 갖추고 고혜의 집으로 가서 매복하도록 일을 진행했다. 연칭과 관지부는 비슷한 시각에 고혜가 자신들을 집으로 초대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들은 존경하는 나라의 어른께서 자신들을 인정했다는 사실에 더할 수 없이 기뻤다. 그래서 각자 고혜에게 바칠 선물을 한아름씩 싸가지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고혜의 집으로 달려갔다. 고혜는 옹름에게서 이미 대부들이 상의한 자초지종을 듣고 계책에 따라 충실히 준비해 두었던 터라 곧 두 사람을 실내로 안내하고 주안상을 차려 접대했다.
"음탕 무도한 임금을 없애고 새로 임금을 세운 두 분께 참말로 감사를 드리오. 이 늙은이는 바로 두 분 덕택에 가묘(家廟)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게 되었구려. 이에 두 분 영웅께 변변치 못하나 약주 한잔 올리는 바요."
연칭과 관지부는 그야말로 당장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뻤다.
둘이서 준비한 듯 대꾸했다.
"어르신네의 분부를 받잡고 이렇듯 달려와 대접을 받다니 참으로 광영입니다."
이렇게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환담하고 있을 때 고혜의 집 대문이 소리없이 닫혀졌다. 고혜가 미리 문 지키는 자에게 단속하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