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2장
공자에게서 이 <자기-송사>는 임시적인 은유에 불과하며, 그의 주요한 방향성과 양립할 수 없고, 오직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목적들을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근거들이 있다. <논어>전반에 흐흐는 정신이 소송 '형벌, 규제 등등'에 대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공자는 드러내 놓고 <반드시 필요한 것은 송사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송>이라는 말은 도덕적 태도라기보다는 소송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는 것이 표준적이라는 점, 소송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 도덕적인 뉘앙스로는 여기에서 유일하게 쓰였다는 점 등등은 감정이 듬뿍 실린 아래와 같은 영탄조의 문장을 반어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요즘 사람들은 끊임 없이 서로 사소한 문제로 다툼을 벌이며 다른 사람이 실재로 한 잘못은 물론 상상해 낸 잘못까지도 고발한다. <상대를 고발하는 데 그렇게 신속한 반면에 자기의 잘못을 바라보고 그 자신을 송사할 수 있는 사람은 어찌 그리 찾아 볼 수 없는지!>
지금까지 우리는 <논어> 원문을 해석하면서, 공자가 그 자신 실제로 선택, 책임, 도덕적 응보로서의 벌, 죄책감, 회개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보았다.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도라는 이미지의 중심에서 선택의 관념이 명백하고 풍부하게 발전할 기회가 내재되어 있지만, 그 기회는 (공자에게서는) 눈에 띨 만큼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그리고 도덕적인 병듦, 자기-송사, 내적 성찰에 대한 고립된 언급들은 있지만-그 각자는 책임, 죄책감 그리고 회개에 대해 관심 있는 이에 의해 그렇게도 풍부하고 적절하게 쓰일 잠재적인 가능성은 있지만-이 중에 어떤 것도 공자에 의해서 발전되거나 혹은 어쨌든 조금 더 (깊게) 천착되지 못했다. 그것들은 고립된 채로, 임시적인 은유들로 남아 있다. 그 은유들은 아마도 지금은 잊혀진 그들의 원래 맥락에서는 반어적인 혹은 시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끝으로 수치심에 대해서는 좀더 자주 그리고 체계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외적인 소유, 행동 혹은 지위와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오염되고 부패한 자아에 대한 내면의 고발이라기보다는 외부 세계와 관련된 자신의 지위와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진 도덕 감정이다. <논어> 원문의 맥락에서 보이는 선택-책임-죄책감이라고 하는 개념 체계의 결여는, 그가 그처럼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에 대한 통찰력이 넘치는 철학자였음을 고려한다면, 문제의 개념들과 그것들에 연관된 이미지들이 공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거부되었다기보다는 단지 단순하게 그의 사고 속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이 그 타당함을 입증하였다.
(<논어>에서) 공자 사상의 주된 틀을 형성하고,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말과 이미지는 우리 (서양인)에게 상이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조화로운 그림들을 보여주고 있다.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은, 실재의 선택항들 중에서 선택하여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에게 고유한 내적이고 결정적인 힘을 갖고 있는, 궁극적으로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대신에 인간은 <원자재>로 태어났다. 그는 교육에 의해 개명되어야 하며 그래서 진짜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도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도는-그것의 고귀성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고매성을 통해-그 사람을 틀림없이 사로잡을 것이다. 이런 사유의 결과는 사회 혹은 물리적인 환경에 대립하여 그것을 압도하는 인간의 힘을 증강시키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다. 차라리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 하나인 참된 도를 빗나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그 지점으로 향하는 그 사람의 <목표> 혹은 방향성을 예리하게 인식시키고 꾸준하게 이끌어 나가는 그런 것이다. 그는 개명한 인간 존재인 것이다. 그 도를 걸어간다는 것은 그 도에 담겨 있는 거대한 정신적 존엄성과 힘을 그 사람 속에서 체현한다는 것이다. 도에서 벗어 나가는 사람보다는 도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그리고 억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개인적인 존엄성과 성취의 삶을, 그리고 서로에게 바로 그러한 삶을 허용하는 상호 존중에 기초하는 타인과의 사회적 조화의 삶을 사는 것이다.
때문에 공자에 있어 주된 도덕적 문제는, 어떤 사람 자신의 자유 의지에 선택한 행위에 대해 그 사람의 책임 소재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도에 대하여 적절한 교육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가 그 도를 열심히 배울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이다. 도덕 질서'예'를 따르지 못하는 행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비록 결과가 사악한 것이 될지라도 자유롭고 책임이 따르는 선택에 대한 자기-유죄 판결이 아니라, 단순한 결점, 힘의 부족, 요컨대 자기의 <(인격) 형성>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재교육인 것이다. 이런 점에 관해서도 서양인들은 부지런한 노력이 부족한 것에 대해 개인적 책임이라는 문제로 역설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하게 <논어>에서는 그러한 종류의 문제는 한번도 제기된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좀 도식적인 방식으로 요약을 한다면, 공자에게서 도덕적인 문제들은 다음의 네 가지 형태들 중의 하나로 귀착된다. (1)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무엇이 도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를 인식하고 또 적절하게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잘 교육받지 못했다. (2)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어떤 면에서는 그 도를 따라가는 데 필수적인 노련함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3)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요구되는 노력을 지속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힘의 문제로 이해된다' (4)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어떤 행동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고는 있으나 그 도에 전적으로 마음을 쏟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쉽게 잘못을 범하거나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예의 외적인 형식을 체계적으로 오용하거나 왜곡시키고 있다.
공자의 철학적 견해는 인간을 비극적 존재, 내적인 위기와 죄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는 면에는 아무런 기초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마련하는, 사회 지향적인 관점을 제공해 준다. 게다가 우리가 여기에서 언급한 논의들을 공자의 인간관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이 맥락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좀더 토론할 것이다-에 놓고 본다면, 내적인 인간과 내적인 갈등이라는 (서양인들에 익숙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인간 개념에는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공자가 이상화한) 인간의 존엄성은, 신묘함과 세련미가 있는 그런 삶, 그 안에서의 인간의 행위가 자연의 맥락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으며 동시에 성스러움과도 조화될 수 있는 그러한 삶, 그리고 그 안에서 실천적, 지적 그리고 영적인 것들이 동등하게 외경되며, 하나의 행위-즉 예의 행위-속에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그러한 삶의 모습들의 절정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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