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2장
치의 관념은 여러 가지 맥락에서 나타난다. 어떤 경우 그것은 물질적인 이득을-예를 들면 좋은 옷, 좋은 음식, 부유함-그 자체에 대한 관심 혹은 그것들의 소유를 다루면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도에서 어긋난 방법으로 얻었거나 공적인 일의 수행과 관련해서 그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언사나, 용모, 아첨, 교만, 위선이 지나친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끝으로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치는 여러 곳에서 오명과 짝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 (개인적 이해 관계 때문에) 자기의 공적인 역할을 오명으로 끝내는 사적 행위에 대한 유비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중국과 서양간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이런 치에 관한 원문들은 우리 (서양인)들로 하여금 공자의 <수치심>을 서양의 <죄책감>과 같은 것으로 보기 쉽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과 연관지어 본다면 그런 관점의 차이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비록 치가 틀림없이 도덕적 개념이며 어떤 도덕적 조건 또는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감당하는 도덕적 관게란 개개인이 바로 예에 의해 규정되는 자신의 (공적인) 지위와 역할에 대해 가지는 도덕적 관계이다. 치는 따라서 <내면적>이라기 보다는 <외면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말은 했으나 못지키는 말의 문제요, 부도덕하게 취득한 재물의 문제이며, 용모와 행동을 지나치게 꾸미는 위선의 문제이다. 이런 치는, (서양의) 죄책감처럼, 결코 내면적인 상태, 내심의 타락에 대한 혐오, 자기 비하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관련 되어 의미를 갖는) 공적인 지위나 호평과 전혀 관계없이 오직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천박하거나 혹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보는 (즉 자기 내심으로부터 나오는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수치심을 도덕적 실재가 아니라 <단순한 겉모습>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이다. 공자의 수치심 개념은 순전한 도덕적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존재의 내적 핵심, 즉 <자아>를 향해 있다기보다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의례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사회적 처신, 즉 예를 중심으로한 도덕성으로 향해 있다. 도덕 질서를 어기는 것은 따라서, 서양의 죄책감의 경우 못지 않게, 공자의 수치심에서도 본질적인 것에 대한 파괴로 간주된다. 개인적인 반응, 도덕적 가치가 혼입된 느낌의 색조가 또한 두 경우 모두에서 핵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느낌을 해석하고 취급하면서 취하는 방향은 두 가지 경우 서로 다르다. 진실로, 죄책감을 갖게 되는 근거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어떤 비도덕적 행위나 배신의 경우라 할지라도 죄책감을 느끼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궁극적으로 죄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다. 수치심은 '체면'의 문제이며, 당혹함의 문제이고 사회적 지위의 문제이다. 수치심은 말한다. <네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을 바꾸어라. 너는 더럽혀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내 영혼의 병듦>에 대해서, 그것의 <상처>에 대해서, <수렁에 빠져 꼼짝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신에 의해 건져져 씻겨지는 것에 대해서, 영혼이 병들어 기형적으로 된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공자를 대충 읽었다 하더라도 <논어>에서는 그런 이미지 혹은 그에 유사한 어떤 분위기조차도 낯설다는 점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논어>에는 도덕적 타락을 암시하는 구절이 두 개 있다. 그것들은 언뜻 보면 곧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숙고된 타락과 유사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한 구절은 재여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공자가 주는 이미지는 오르페우스, 히브리 혹은 기독교의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재여는 조각할 수 없는 썩은 나무이며, 흙손질할 수 없는 마른 똥무더기 담이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사람이다. 여기에서는 왕성한 질병, 즉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울부짖게 만드는 상처는 단순한 무기력,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소극성과 내재적 무감각으로 대체되어 있다. 재여는 기껏해야 도덕적인 인간 존재가 될 능력을 상실한 정도이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는 이미지에서는 타락한 죄의식이 갖는 강도나 역동성은 바로 그의 도덕적 관심과 절박한 개종 (기독교에의 귀의)이 갖는 활력소의 크기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에 관한 <논어>의 두번째 언급은 내심의 병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이 그 자신의 내심을 살펴 보아서 아무런 병든 곳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연히 어떤 근심도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병>의 이미지를 그렇게 사용한 유일한 경우이다. 나는 <병>에 대한 이 고립된 인용을 이때만을 위한 임시 방편적이고 정교화되지 않은 비유, 즉 다른 많은 경우와는 달리 공자 자신의 별반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 비유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비유는 확실히 중심적인 교의에 대한 선언 또는 은유가 아니다. 따라서 (공자 철학에서) 그것의 정확한 논점은 불분명하다. 비록 그 이미지가 우리 (서양인)에게는 매우 친숙하고 또는 우리의 용법에서는 그렇게도 풍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그런 것을 별로 문제로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직 검토해야할 또 다른 두 개의 구절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명백하게 <내심을 향한> 방향성과 <자기 견책>을 요구한다. 공자는 한 구절에서 우리에게, 우리가 가치없는 다른 사람들(불현자)을 바라보고 있을때, 우리 자신의 <안>을 들여다 볼 것을 말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스스로의 잘못을 알고서 자신의 내심에 책임을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탄식한다. 내면의 삶에 대하여 우리 (서양인)들이 배경적으로 갖고 있는 풍부한 이미지는, 다시 한번 이런 구절들을 바로 자아의 내면 세계, 죄책감, 혹은 레그가 암시하고 있는, 양심과 도덕적인 책임에 대해서도 공자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간단하고 명백한 증거물로 보게끔 된다.
그러나 12:4(3)에서의 <내심의 병>을 포함해서 <논어> 전체에서 그러한 <내심을 살펴봄>에 대한 언급이 오직 세 군데에서만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공자가 양심이나 죄책감을 언급하였다고 가정하는데에 더욱더 신중할 것을 요구한다. 양심 혹은 죄책감이 어쨌든 명료하게 인식되기만 한다면 그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도덕 생확에 핵심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만약 공자가 어떤 <내적인> 삶을 염두에 두었고 또 그것을 강조하였다면, <논어>의 전체 500여 절 더욱이 그 중 세 번만 그런 것에 대해 언급했단 말인가? 그리고 또한 어째서 그 세 구절마저 그리 모호하고 또 정교하게 다듬어 서술되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는 공자가 다른 관념들, 즉 도, 인, 덕, 예와 같은 관념들에 대해서는 주저없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 서술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논어>가 전체적으로 모든 세세한 면에서 주로 도덕을 가르치는 담화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러한 담화는, 다른 무엇도다 먼저 양심, 죄책감 그리고 내심의 삶에 관한 주제를 정교하게 다루게 마련이다.
사실 <내심을 살핀다>라는 이미지를 사용한, 맨 끝의 두 구절에서의 공자의 말은 그가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것과 완전히 합치되는, 전혀 또 다른 맥락으로도 독해될 수 있다. <이인> 4:17에서 공자의 말씀은 가치 있는 사람들처럼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자의 시대처럼, 정치적인 내부 투쟁, 사회적인 경쟁, 군사적 충돌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소송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결점을 꼬집어 내어 폭로하며 그렇게 하기를 즐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경향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게 하는 대신 <우리 자신의 속을> 보라고 하였고, <자기 자신을 소송하라>고 가르친. 앞의 말씀은 매우 모호하고 잘 다듬어져 서술되지 않았다. 뒤의 말씀은 극도로 혼란한 공자의 시대라고 하는 그 특정한 그 시대에-공적인 고발이나 송사가 매우 명백하게 논의되던 상황이라는-매우 일상적인 맥락에서 언급되었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사실, 공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눈 속의 가시를 보지 말고 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법정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를 배경으로, 공자가 <공야장> 5:26에서 한 말씀은 또한 예수의 <판단하지 말라>는 말과 유사하다. 그러나 고발, 재판, 판결에 관한 말은 구약과 신약 성서 모두에 두루 나오는 데 반해서 <논어>에서는 전체를 통틀어 여기에서 단지 한 번 도덕적 은유로서 나타난다. 우리 서양인 모두는 또한 이 은유가 도덕적인 삶에 너무나 잘 들어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공자가 단지 한번 그것을 사용하고 곧이어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한번 우리는, 공자의 양심이 체게적으로 우리 (서양)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리잡혔으며 그 비유에서는 오직 임시 방편적이고 (특정 사실과 관련해서) 시사적인 언급만을 한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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