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2장
갈림길 없는 오로지 하나의 도
공자는 <논어>에서, 선택 혹은 책임에 관한 말을 세심하게 논의하지 않았다. 가끔 그 비슷한 용어가 사용되기도 ㅎ지만, 이 말들은 서양의 철학적, 종교적인 인간 해에서 중추적 의미를 갖고 있는, 그런 (서구적) 특색으로 발전되지도, 엄밀하게다듬어지지도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양에서는) 이런 선택이나 책임의 개념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으로 궁극적인 힘과 서로 함께 묶여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개인들은 이런 자신들의 존재론적인 힘을 통하여 개개인 자신의 영적 운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이나 책임의 개념은 (그 개개인들은 그들에게 천부적으로 부여된 궁극적인 존재론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들은 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며, 또한 그 저지른 죄에 대하여 회개도 할 수 있고, 아니면 그에 합당한 심판도 받을 수 있다는 (서양 고유의)관념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공자는 선택과 책임이라는 말을 그런식으로는 다루지 않았다.
우리 서양인들은 위와 같은 맥락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깊이 안주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 즉 공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한 번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뭐니뭐니해도 공자는 사회 속에서의 인간이란 무엇이며 그 안에서 인간이 차지해야 할 위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데 깊은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다. 그는 우리들이 (오늘날) 도덕적인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문젯거리를 정의하고 설명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위대하며 창조적인 교육자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선택>과 <책임>을 둘러싼 그런 (서양식) 관념들의 체계를 간과할 수 있었을까? 선택과 책임에 관한 말이 (중국의 사유 체제에서) 발전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선택하거나 책임지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님을 우리는 즉각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자 시대에도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보다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또한 고대 중국에서도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진지한) 선택을 했으리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혼의) 죄책감이나 회개 또는 죄에 따른 응당한 징벌 등의 말들이 우리 (서양사람)들이지금 그것들을 쓰는 그런 의미로 (고대 중국 사회에서도) 통용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확신이 나에게 없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서양적인) 이런 관념들이 지시하는 실재 대상들이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전혀 부재했다는 확신 또한 나에겐 없다. 물론 고대 중국에 있었던 징벌 관념은 (범죄 행위의 결과를 처벌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범죄 행위의 발생 자체를 미리 차단하려는) 예방적인징벌 관념이었다. 즉 저질러 놓은 죄를 씻어 내기 위한 응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악행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엄혹한 <교훈> 또는 글자 그대로(자유 자재로 활동할 수 없게끔) 절름발이 병신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이런 (동서양간의 관념적인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후자의 논점을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택>과 <책임>의 경우, 이 말들이 지시하는 실제 대상들이 (중국의 사유 체계에도) 분명히 존재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서양에서는 그런 실재 대상들을 표현하고 그들 내부의 모습과 움직임을 자세하게 추적하기 위한 정교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공자'그리고 그 당대의 사람들'는 그와 같은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들 고대 중국인들은, 같은 시대의 그리스나 근동의 여러 민족들에게서는 핵심적인 의미를 지녔던 그런 도덕적 실재 대상들에 대해 별로 진지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관심 부재>를 뚜렷이 밝힐 수 있는 가장 계발적인 방법은 <논어> 속에 제시된 가장 중요한 형식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논어>의 관심은 <타오>이다. 타오란 도, 즉 길이나 도로이다. 비유적으로 확장된 일반적 의미로 그것은 고대 중국에서 삶의 올바른 도, 통치의 도, 인간 존재가 걸어야 할 이상의 도, 우주의 운행 방식, 만상의 존재 자체를 생성시키고 규범화하는 (즉 만물의 소이연지고와 소당연지칙으로서의 도 '이치, 길, 과정') 등을 의미한다. '<논어>에서 <도>는 그것의 가능한 또 다른 하나의 의미인 <말> 혹은 <말하다>의 의미로는 쓰이지 않고 있다' <논어>에 제시된 도의 형상적 의미는 걸어가는 길의 비유가 가장 많다. <논어>원전에 대표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문자는 걸어다니는 길, 도로, 걷다, 궤도, 따라가다, 통과하다, 부터, 까지, 들어가다, 떠나다, 도착하다, 나아가다, 곧다, 굽다, 평탄하다, 부드럽다, 멈추다, 위치를 정하다 등등의 의미를 가진 것들이다. 도의 관념은 당연히 공자의 핵심적 과념인 예와 상통하는 관념이다. 공자에서 예는, 사회적 교제, 즉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한 예식을 명백하고 세세하게 나타내 주는 패턴이다. 참된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모습과 예식을 멋들어지게 올리는 모습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것은 아주 쉽고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예를 특정한 도로 체계, 다시 말해 길이 그려진 지도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어지면, 이 길이라는 형상적 의미를 발전시켜서 선택, 결정, 책임 등의 관념을 이끌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 서양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다듬어진-도의 이미지에서 파생되어 나온-갈림길의 이미지를 이끌어 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택이라는 관념을 표현하기에 이렇듯 딱 들어맞고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바로 이 갈림길의) 비유가 정작 <논어>에서는 결코 한번도 쓰인 적이 없다. 사실 갈림길의 모습은 자세하게 그려진 도로 그림에서는 어디에라도 매우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요소이다. 그러나 (공자의 경우처럼) 우주를 기본적으로 명명백백하고 단일하며 확정된 질서를 가진 것으로 보다는 관념에 깊이 빠져 있다면, 그런 사람은 갈림길의 이미지로부터는 도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전(의 관념을) 생각해 내지 못할 수 있다. 참된 도를 바르게 걸어가 살펴볼 때, 이런 단일하고 확정된 질서에 대한 공자의 애착 또한 자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그 다른 선택이란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도를 잃은 것이거나 (도를 찾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질서(즉 도) 이외의 <다른 선택>은 모두 무질서이며 혼란인 것이다. 우리가 도를 따라 계속 간다면 결국 어디에 이르는 것일까? 이 여행을 종결시키는어떤 목적지가 있는 것일까? 공자가 제시하는 (도의) 형상적 의미는-말하자면 그곳이 항구이거나 고향집 혹은 황금의 도시이거나 또 다른 그 무엇으로 묘사되든-어떤 미리 정해진 혹은 이상적인 목표점에 도달하려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정신적으로 고귀한 사람(군자)은 어떤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상태, 즉 아무런 애를 쓰지 않고도 적절하게 도를 따라가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그 자체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도를 따라가는 것을 터득함으로써 그런 평정한 상태에 이르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지도 위의 어떤 특정한 장소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목표점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다. 목표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도의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를 올바로 잘 터득하여 지금 자신이 도를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 도를 얼마나 잘 따라와서 그것을 몸에 잘 익혔는가 하는 수준에 관계없이, 그리고 우리가 이미 얼마나 배웠는가하는 수준과도 관계없이 우리는 진실로 도를 따라갈 수 있다. 왜냐하면 도에 아직 완벽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 도를 배우는 일에 온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 그 자체가 도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이에게는 배우는 이의 도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상태에 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짐은 무거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모든 것을 마무리지운 인자, 즉 예에 완벽한 사람, 진정으로 고귀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견습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논어>에 나타나 있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인간이란 진정한 인간으로 형성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이 세상-좀 더 구체적으로 한 사회-에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처음에 태어날 때는 다듬어지지 않은 덩어리. 물질적 재료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조야한 존재는 학문과 문화, 즉 예를 통해 꼴이 잡히고 잘 조절됨으로써 정품으로 다듬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자르고 다듬도, 쪼고, 윤을 내는> 일은 잘 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다. 자신이 고통을 참아 내고 적절히 제대로 노력하고 그리고 교사들에 의해 잘 훈련을 받아서 이런 수련 과정이 잘 진행된다면 그만큼 그 사람은 도를 향하여 똑바로 걸어나가게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상적인 것에 따라 모양이 잡히지 못하면 바로 그 결점으로 인해 그 사람은 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의미의 선택이란 없으며 중요한 것은 도를 따라가거나 못 따라 가거나이다. 도가 아닌 다른 <통로>를 선택했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진정한 길을 택했다는 뜻이 결코 아니며 단지 심지가 연약하여 그 진정한 길을 따라 가기에 실패한 것일 뿐이다. 만약 선택이라는 말의 의미가 여러 가지 똑같이 실재적인 선택사항들 중에서 하나를 행위자 자신이 자기 힘으로 고르라는 뜻이라면, 공자가 제시하는 가르침의 형상적 의미는 그러한 선택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공자의 가르침은 도를 따라가기 위해 우리 자신이 자기 힘을 쏟느냐, 아니면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여, 즉 힘이 없어서 삐뿔어지고 결국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하여 물질적 이득, 유리한 이점, 개인의 안락과 같은 환상을 헛되이 쫓고자 넘어지고 자빠지고 이리저리 헤맨다는 식으로 문제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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