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1장
<나는 내 시게를 내 동생에게 줄 것을 유언한다>라는 언사를 적절하게 말로 표현했거나 글로 쓴 것은 내가 이미 행동한 것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이런 유증 자체의 실행인 것이다. 결혼식에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승낙하는 내심의 정신적 행위에 대한 보고가 아니다. 그것은 결혼 계약의 한쪽 몫을 완결 짓는 행위 자체인 것이다. <나는 약속한다>라는 말은 조금 전에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에 대한 보고가 아니며, 그 외의 다른 어떤 사실에 대한 정보 제공 또한 결코 아니다. 그 말을 한 것은 그 자체 약속에 대한 실행일 뿐이다. 말을 통해서 그리고 이런 말들이 한부분을 이루고 있는 예식을 통해서 우리는-<마음에서 예에 따라 행하는> 사람의 경우처럼-어떤 책략들이나 강제성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더욱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자신을 규제하는 것이다. 예에 힘을 쓰는 사람은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물리력만을 행사하는 사람은 결코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공자는 진실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관례를 몸으로만 익히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또는 적절한 구도를 갖추지 않고 말만 했거나 관례의 효력만을 바랐다면, 또는 예식이 충실하게 수행되지못했다면, 또는 예식을 올리는 사람이 적절히 권위를 가진 그런 사람 '즉<권위의 행사>-다시 말해 예식')이 아니었다면, 예의 효력은 없는 것이다.요컨대 예식의 몸짓과 말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도덕적인 구속력은 예식 행위와는별개로 유리되거나 추상화 될 수 없다. 우리가 예식에서 쓰고자 하는 것은 겉으로 현란하게 보이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예식의 (즉 예식을 올리는 현장 그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힘이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노예에 대한 관습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면, 나는 나의 종을 다른 누구에게 유증하는 예식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 내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나는 2달러를 놓고 내기를 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훌륭한 변호사라 해도, 지정된 법정에서 지정된 의식의 절차와 권위를 빌리지 않고 다만)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어떤 범죄에 대한 <유죄> 혐의를 법적으로 변호할 수 없다. 이와같이 예의 힘은 예가 충분히 존중되지 않고서는 발휘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점 또한 공자가 늘상 되풀이해서 하신 말이다.
<세 귀족이 (천자의 예인) 옹 음악으로 예식을 끝내다니! '예에 따르면, 옹의 음악을 쓸 신분이 아닌')이 세 귀족의 사당에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되는 것인가?>
지금 우리로서는 우리들의 언어나 예식속에 명백히 알수 있는 수행적 공식 언표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한 그만큼 분명하진 그러나 자못 중요한 수행적 공식 언표들, 예를 들면 자신의 소원, 애호, 선택을 표현하는 언표들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 물건을 선택한다>는 말은 자신이 나중에 그 물건을 받아 보고, 그것은 참 뜻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식의 이의 제기를 배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절한 상황에서 그런 언명을 한 것은 이미 일어난 어떤 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함에 따른 (앞으로) <수행해야할> 단계로의 이행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언어가 갖는 <예식 수행상>의 상관 관계에 대한 이런 연구의 결론은, 오스틴 교수의 추론에 따르면, 자못 역설적이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모든 언명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수행적이라는 결론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 결론은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는 '과거에는 실용주의적인 철학 경향들의 기본 주제였으나' 지금은 현대 분석 철학의 상투어라는 점과 우리는 어떠어떠한 일들, 즉 상당히 중요하고 매우 다양한 일들을 한다는 낱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로 충분하다.
실제로 아런 새로운 철학적 통찰의 중심적인 교훈은 언어에 대한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예식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우리 방식대로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바로 예식이 인간 존재의 실체를 이루는-그런 인간 존재 영역이 얼마나 광대한 것인가이다. 각종 약속, 합의 사항, 실수의 해명, 변명, 찬사, 협약-이런 등등의 일들이 예식들이다. 이것들이 예식이 아닐 때는, 이들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식을 매체로 하여 우리에게 고유한 인간 생활이 유지되는 것이다. 예식 활동은 따라서 그 어느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제일 우선적인 일이다. 언어가 뿌리를 박고 있는 사회 관습 속에서의 언어 행위와 무관하게 추상화되어 이해되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인습적인 언어 행위 또한 자신을 규정하고 동시에 그 자체도 한부분을 이루고 있는 언어와 고립되어 이해될 수 없다. (만약 누구와 약속을 한다면) 그 약속이란 순전히 물리적인 동작일 수만은 없다. 예식적 상관 관계, 주변의 환경적 요소와 각자의 역활 등과 전혀 관계없이, 오직 말만으로는 약속이 성립될 수 없다. (순전히 물리적으로만 계량되는) 말과 동작이란 구체적인 예식 행위로부터 (일탈된) 추상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근육 동작 기술에 숙달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말을 또한 올바르게 (즉 예의 적절하게) 사용해야만 한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식에 맞는) 올바른 언어 사용은 (물리적) 몸동작과 마찬가지로 효율적인 행위를 구성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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