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1장
진실되고, 뚜렷한 인간적인 힘은 특징상 신묘한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공자는 일찍이 간파했으며, 그것에 대한 주의를 우리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이미 너무나 친숙하고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사실 공자의 과제였다고 하겠다. 이런 경우에 필요한 것은, 우리 인간 존재의 이런 <자명한>면을 새로운 각도와 올바른 방법으로 만나는 일이다. 이러한 친숙한 영역으로 통하는, 즉 우리에게 새롭고 계시적인 시각을 마련해 주는 그러한 새로운 길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공자가 찾았던 길은 바로 예라는 통로였다. 예를 익히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힘든 공을 들여야 한다.
예의 의미는 어원상<거룩한 예식>(holy ritual), <신성스런 의식>과 가깝다. 공자 가르침의 특징은예식을 올릴 때 쓰이는 말과 이미지들을 매개로 하여 그 안에서 인간 습속, 좀더 정확히 말해서, 인간 사회의 참된 전통과 합당한 관습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과 예에 복종하는 의지가 바로 인간을 인간이게 할 수 있는 완전하고도 특유한 인간의 덕 또는 힘이라고 공자는 가르쳤다. 여기서 공자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전통과 관습이라는 전체에 주목을 하게 하며, 또한 신성한 예식, 거룩한 의식의 형상 등을 통하여 이런 모든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게끔 한다.
'정신적으로' 고상한 사람은 조야한 인품을 사회적 형식인 예와 잘 융화시켜서 이 둘을 덕, 말하자면 인간의 가치를 뚜렷이 나타낼 수 있는 힘으로 전환시키는 연금술(또는 도덕 연마)에 많은 공을 드린 사람을 말한다. 덕은 인간 상호간의 하나의 전형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들 속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전형들은 모든 예에 공통되는 일정한 일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전형이 되는) 행동들은 <인간에 대한 인간다움>, 즉 인간들 상호간의 성실성과 존중을 참되게 나타내 주는 모든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형적 행위들은 또한 특징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망인에 대한 애도, 결혼, 결투, 군사, 아버지, 아들 등등이 되는 인간적인 전형으로 세분화되어 문명된 행위를 구성하는 예식 진행의 절차를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여하간, 인간이란 어떤 우주적 또는 사회 법칙에 의해 규정된 상투적 행위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단순히 표준 규격화된 단위로만은 결코 간주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은 사회 계약에 (능동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자기 충족적이고 개별적인 (즉 원자적으로 완결되고 독립된) 인격체도 아닌 것이다.
인간의 조야한 충동이 예에 의해 도야됨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인간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는 인간적 충동의 완성, 즉 충동의 문명적 표현이지, 결코 형식주의적인 비인간화가 아니다. 예는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를 생동적으로 살려 내기 위한 인간 고유의 형식인 것이다. 공자 이전에는 다만 <거룩한 예식>, <신성스런 의식>이라는 그저 일상적인 의미였던 것을 바로 인간 고유의 자기 계시적인 이미지로서, 말하자면 전통과 관습을 배워 익힌 인간 고유의 존재적 측면으로 바라 볼 수 있게 한 것은 공자의 훌륭하고도 창조적인 통찰력 덕분이라고 하겠다.
능숙하게 익힌 의식을 몸소 행하면서, 각자는 전형적 행위에 따라 해내야만 되는 것으로 상정되는 바로 그 행위를 하게 된다. 나의 몸짓은-우리들 중에 아무도 억지를 쓰거나 밀어 부치거나 요구하거나 힘으로 해결을 보려고 했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조작>해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저절로 상대방의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우리의 몸짓은 그때그때 적절하게 아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참여자들의 몸짓과 어울리는 것이다. 모두가 <예에 숙달되어> 있다면, 적절한 예식의 맥락 속에서-사실 글자 그대로-예에 맞는 몸짓을 해내면 될 뿐인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일어날 뿐인 것>이다. 순임금이 무엇을 하였는가? <자기를 받드는 마음으로 남을 대했을 뿐이로다!> 우리는 다음에서 신성한 예의 이런 자기 계발적인 이미지가 강조하는 행위의 분명한 특징들을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억지 없이 자연스럽다는 말을 <기계적> 또는 <자동적>이라는 뜻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식을 올리는 행위가 만약 자동적, 기계적이라면, 공자가 누차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 예식은 빈약하고 공허하며 죽은 것이다. 그 속에는 혼이 없다. 에식의 참된 <모습>에는 일종의 자연스런 자발성이 있다. 예식을 올리는 개개인들의 진지하고 성실하게 몸과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에, 예식에는 생명력이 있다. 정말 진짜 예식이 되게 하려면 누구나 <제사에 몸소 참여>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제사를 전혀 드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를 잘못 집행하는 두 가지 사례가 있는 것이다. 숙련된 세련미 부족으로 예식이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진행되거나, 예식이 겉으로 보아서는 매끄럽지만 진지한 목적 의식과 실천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어딘가 기계적이며 맥이 빠져 보이는 경우이다.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에식은 숙련된 예식의 세련미와 혼용하는 집행인의 <현장성>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이상적 융합이 바로 신성한 예식이라는 의미의 진정한 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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